태풍이 제주도로 올라오고 있다. 위성사진을 보니 눈을 부릅뜨고 덩치를 키우고 있다. 슈퍼태풍과 만나는 일은 없길 바랐는데, 현재로선 2003년 기록적 피해를 입혔던 태풍 매미보다도 덩치가 크다.
지금껏 제주에 살면서 가장 큰 공포를 느꼈던 태풍은 2012년 볼라벤이었다. 제주에서 처음 겪은 2011년의 태풍은 견딜 만했다. 그런데 다음 해 찾아온 태풍 볼라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동안 육지에서 겪었던 태풍은 태풍이 아니었다. 2012년 거대한 태풍이 올라온다고 뉴스마다 호들갑을 떨 때처음엔 기뻤다. 새로운 태풍 경험을 하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겪는 태풍의 위용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며 흥분했었지. (죽기 전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미치기도 한다.)
결국 볼라벤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현관을 열 때 현관문이 뜯어질 뻔한 것까지는 ‘오우!’ 역시 대단하구나 하며 뻐기는 정도였다. 거센 바람에 실려오는 빗방울은 하나하나 바늘처럼 살갗을 때렸다. 하지만 견딜만했다. 비바람의 폭격을 뚫고 걸음을 옮겨갈수록 점점 침착해졌고 나름 이런 생각도 했었다.
"이렇게 살았어야지. 온몸으로 역풍을 견디며 전진했어야지."
이때를 떠올리면 정말 부끄럽다. 인간의 오만은 죄악 가운데 으뜸이다. 나를 포함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에 대해 손톱만큼도 알지 못한다. 정작 죽음의 순간이 오면 아차 하는 것이다.
수영복을 입은 채로 평소 다니던 산책길에 도착했을 때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이런 나를 누군가 목격해주지 않아서 실망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집안에서 모두 웅크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우쭐해진 것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주에서 절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마시라. 목숨이 경각에 달릴 때 뇌의 반응에 대한 연구 결과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극렬히 활성화된다.) 초능력이 생긴다고나 할까?
갑작스레 가늠할 수 없는 거센 돌풍이 불었다.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바람이 아니었다. 커튼 찢어지는 듯한 바람소리가 나더니 사방에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도 신음소리를 낸다. 당연히 나도 쓰러졌다.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를 움켜쥔 거대한 숲들이 사투를 벌였고 그 진동이 땅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화살처럼 쏟아져 날아왔다. 순간 살기를 느꼈는데 그 방향으로 쳐다보니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화살이 되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속도는 시속 80km 정도 되었겠지만 내 눈에는 잠시 멈춘 장면처럼 나뭇가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온 세상이 멈췄다. 바로 그 순간, 태풍의 신과 만났다.
태풍이 만든 제주 해안의 음각
태풍의 신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만 한가?"
아! 그렇다.
나는 죽음이란 명제를 안고 제주도에 왔는데, 아직도 영원히 살 것처럼 촐싹대고 있었다. 병원에선 기적이라 말하며 일단 호전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당장 내일 바람맞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화살이 되어 날아오던 나뭇가지는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뒤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어서 집으로 돌아온 그 뒤로, 나는 태풍이 올라오면 큰절을 올린다.
그렇게 볼라벤이 지난 뒤, 해안으로 나가보았을 때 나는 또다시 겸손해졌다. 소형차만 한 바위가 어느 집 대문에 처박혀 있는 풍경을 본 것이다. 거대한 해일의 위력이었다. 간혹 부동산에서 올라오는 이런 매물정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