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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14. 2022

참호 일기

돈키호테와 바퀴벌레

2015. 7. 18. 토

여름에 오는 손님들은 마주하기 벅찰 때가 많다.

이유가 뭘까?


친구랑 술 마시느라 언제 올 지 모른다는 A실 손님.

(게스트하우스 원칙 상 오후 11시 이전 입실을 사전 고지했는데....)


B실은 결혼 8개월 차 신혼부부. 남편이 수다쟁이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 자랑으로 첫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하루 방문객이 2천 명이라며 자꾸 내게 ‘뭐 없어?’ 이런 표정을 준다. (그런 건 안 줘도 되는데.....)

그는 위로 누나만 3명인 대구 출신 외아들.


C실은 40대 직장동료 남성 4명.

이들은 공통적으로 젊은 여성은 용서할 수 없고 젊은 남자는 무조건 용서하는 스타일.

B실 신부 앞에서 젊은 여성을 대놓고 욕하는데 B실 신랑은 놀랍게도 그 얘기에 손뼉 치며 공감한다.

C실 중년 남성들은 김흥수 화백이 43살 연하의 제자와 결혼했다는 사연을 듣자 무척 기분 나빠하며 미술관 방문을 취소하겠다고 한다.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더니 갑자기 실내등을 주제로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 집 싸구려 실내등을 바라보더니 대화 시작)

자기 집 실내등은 백만 원 짜리라며 주저리주저리, 28만 원짜리 실내등을 가진 사내는 자기도 98만 원짜리 실내등으로 교체하려고 주문 대기 중이라며 주저리주저리, 그러더니 느닷없이 자신들 젊은 시절 결혼 실외 촬영 사진을 돌려본다.

(그렇게 잘났는데 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왔을까?)


가장 실망한 것은 나의 아내.

평소 여성 손님들과 미술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대충 마치고 들어오지?” 라며 손님들에게 눈치를 주던 분께서 오늘 마침 남성 손님 대잔치가 열리자 무슨 마음에선지 자리에 합석, 그렇고 그런 뻔한 대화에 맞장구치며 웃고 있다.

(이 사람은 오늘따라 왜?)


외로운 모습으로 서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B실 새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되자 아내도 나에게 뒷자리 정리를 부탁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여성들이 모두 방으로 들어가자 재미가 없었는지 C실 남성들도 씻겠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뭐야, 여성을 그렇게 욕하더니....)


이제 난 텅 빈 거실을 정리하고, 이미 저문 밤길로 모로(반려견)와 마지막 산책을 한다.    

길을 걷다 보니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 미술관 공중화장실에 들렀다. 급히 변기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번엔 느닷없이 바퀴벌레 한 마리가 등장한다. (바퀴벌레 같은 하루다.)


그런데 이놈이 상당히 저돌적이다. 내게 직선으로 달려온다. 허겁하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일 거야.”  (소심도 하지)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슴없이 내게 달려오던 바퀴벌레가 멈칫 선다.

설마 내가 보낸 살기를 바퀴벌레가 느낀 걸까? 내 신발의 조준 경계에 딱 멈춘 바퀴벌레는 더듬이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본다.

(노려보지 말고 그냥 발길이나 돌려라. 제발.)


그런데 계속 노려본다. 기분이 나빠진다.

적당히 나쁜 게 아니라 무섭기도 하고 상당히 화가 난다. (나만 그런가?)     


‘그냥 밟아버릴까?’

이런 마음이 드는 순간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퀴벌레가 갑자기 날개를 펼친다. 마치 나와 한 바탕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듯.

‘뭐야? 바퀴벌레 계의 돈키호테야?’


나는 너무 놀라 그만 그대로 밟아버렸다. 아직 볼 일도 마치지 못했는데 이때 내게 날아들면 모양새가 얼마나 망가질지 모를 일이다.

(하긴 망가졌으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됐을 지도....)

가뜩이나 조용했던 화장실은 바퀴벌레의 장렬한 죽음을 애도하듯 더욱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신발 밑을 애써 외면한 채 배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서둘러 화장실을 떴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신발 바닥을 땅에 박박 긁었다. 모로는 내 속도 모르고 빨리 가자고 왕왕 짖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런 생각에 잠긴다.

<만약 정말로 저 바퀴벌레가 나의 '살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날아오른 것이라면 이런 '기운' 같은 것이야말로 진짜 언어가 아닐까? 나무나 벌레나 새나 뱀이나 인간이나 모두 통하는 공통 언어..... 나도 저 바퀴벌레가 내게 전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저 바퀴벌레는 바퀴벌레 계의 돈키호테였다. 분명 예전에도 저런 행동으로 인간을 쫓아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인간은 자신에게 용감무쌍하게 달려든 바퀴벌레를 보고 기겁하며 놀라 도망쳤다. 어라? 이후에도 그런 일은 여러 차례 발생했다. 그러자 동료 바퀴벌레들이 그를 영웅처럼 받들었다. 영웅이 된 바퀴벌레는 벌레답지 않게 기백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이 스토리를 다듬어 동화로 쓸까 생각 중이다. 이런 생각에 접어들 무렵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 무언가가 서 있다. 그것은 악마처럼 서서 나를 노려본다.

'이번엔 또 뭐야?'


나는 하필 이때, 그 정체가 엄청나게 덩치를 키운 바퀴벌레라는 생각이 문뜩 들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뭐야, 오늘따라 왜 나를 노려보는 것들 뿐이야!'

난 나도 모르게 발을 움찔거렸다. 너도 밟아버리겠다는 듯. (나보다 덩치가 더 컸는데....)


그런데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살기>를 띄우자 그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느닷없이 날아오른다.  그러자 모로가 왕왕 짓는다.

나는 그 기세에 뒤로 자빠졌고 모로를 잡고 있던 줄을 놓쳤다.  

모로는 전의를 상실한 주인을 뒤로한 채 용감한 로시난테가 되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가로등 아래로 날아가자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악마가 된 바퀴벌레가 아니라 거대한 뿔을 올린 수컷 노루였다.  지금까진 본 적 없는 거대한 성체였다. (혹시 사슴 아니었을까? 제주엔 왜 야생 사슴이 없을까?)


모로가 짧은 다리로 종종 거리며 돌아와 내 얼굴을 핥는다.  한번 나빠진 기분은 나쁜 것들을 불러오고 그렇게 온 것들은 나쁜 상상을 하게 한다. 모로는 마치 내 몸에 붙은 그런 것들을 떼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듯 코로 툭툭 밀쳐대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넘어진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약할 수 있단 말인가?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집으로 들어가니 A실 손님이 마침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사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휴 제주도 밤 도로는 너무 어둡네요. 뭐가 자꾸 툭 튀어나오는 것 같아서 운전하며 놀랐어요. 일찍 들어오라고 하신 이유를 알겠네요."


(이봐요.... 음주운전이 더 위험해요.)


한번 나쁜 생각에 휩싸이면 저 어둠 속에 괴물이 바글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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