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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15. 2022

닭장과 서랍

2022. 11. 14.

닭장과 서랍


서랍이 비었다.

서랍이 비어있는 걸 보니 성냥개비라도 넣어두려는 욕구가 싹튼다. 

이때 난 용도가 다 한 존재를 마주하는 걸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속 누군가 명령을 내린다.

“빈 서랍은 용도를 망각했으니 폐기 처분하라.”


서랍이 울며 아뢴다.

“부디 선처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그동안 사용하신 용도를 고려하여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그러자 재판관이 말한다.

“안된다. 이 세상에 용도가 없는 것들은 밥을 굶어야 하느니라. 그게 이 나라의 법이다.”


뜨끔.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런 법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떠올려본다.

이 법을 나 스스로 만든 적은 없지만, 어쨌든 내 마음속 풍경이니 최고 책임자는 내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살벌한 법이 내 마음속을 휘젓게 만들었단 말인가? 

나는 내 머리를 형틀에 넣으며 자책한다.

이때 나는 습관처럼 형틀에 집어넣던 머리를 다시 빼고는 순간 깨달았다.


자책은 왜 하는 거지? 이건 누가 만든 법이지?

맞아. 이건 내가 만든 법이 아니라 부모가 나에게 심어준 법이었어.

마치 모든 법의 뿌리인 헌법처럼, 바뀔 수 없는 세상의 규칙.

부모는 이 법을 또 그의 부모에게 물려받았고 이런 식이라면 

결국 누가 이 몹쓸 법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잖아?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으니 이 재판은 무효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은가?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없다니!

이런 법에 평생 나를 맡기고 살았던 거야?

왜 우리나라는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 

왜 이런 부모들로 채워진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이런 법치 하에서 호의호식하는 자들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죽어서도 담장 안에.....


어릴 때 쥐가 닭을 잡아먹는 방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닭장을 만들 때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다. 


“현서야. 그물은 이렇게 촘촘하게 짜야지, 그렇게 짜면 소용없다.”

“왜요? 이 정도면 고양이도 드나들 수 없을 걸요?”

“쥐가 들어오잖아.”

“쥐가 닭을 잡아먹어요? 닭이 쥐보다 엄청 더 큰데? 닭은 날개도 있잖아요.”


이때 외할머닌 작업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쥐가 어떻게 닭을 잡는지 알려주마. 깊은 밤이 되면 쥐는 살금살금 졸고 있는 닭에게 다가가서 똥구멍에 상처를 낸단다. 그러면 놀란 닭이 달아나지만 그래 봤자 닭장 안이지. 쥐는 이제 시간을 두고 닭이 이 일을 잊길 차분하게 기다려. 도망가는 닭을 쫓아가 봐야 잡지 못한다는 걸 아는 거지. 시간이 흐르면 닭은 멍청해서 금방 쥐와의 일을 잊고 말아. 그리고 똥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다시 졸거든? 그러면 피 냄새를 추적한 쥐는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서 닭의 상처 난 똥구멍을 살살 핥아준단다. 사실은 쥐가 그 피를 마시는 건데 닭은 쥐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착각한 나머지 똥구멍을 그대로 쥐에게 맡기고 다시 잠을 자. 혀로 똥구멍을 핥아주니 닭은 기분까지 좋아져서 쥐가 자신을 잡아먹는 요괴가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하지. 

이렇게 한 열흘, 집요하게 상처 난 똥구멍을 핥아대면 어떻게 될까? 피가 마를 새 없이 흐르게 된 닭은 시름시름 앓게 된단다.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털도 빠지고 누가 봐도 병든 닭이 되는 거야. 그러면 이런 닭은 동료 닭들에게 표적이 돼. 동료 닭들은 병든 닭이 보이면 쪼아대면서 빨리 죽으라고 하거든. “ 


나는 화가 나는 걸 느끼며 물었다.

“왜요?”

“병든 닭은 야생에서 천적을 불러오고 그러면 자신들도 위험해지니까.....”

“닭장은 야생이 아니잖아요.”

“닭장 안에 사는 닭은 그걸 모르지. 본능대로 사는 거지. 아무튼 쥐는 이걸 노리는 거야. 알아서 동료 닭들이 자신들이 먹을 닭을 사냥해 주는 이 시기에 쥐는 다시 나타나 이 닭 사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야. 이땐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등장하지. 병든 닭은 날지 못하기 때문에 금방 쥐들에게 둘러싸여 잡아먹히게 돼. 쥐들이 이 사냥을 할 때 닭의 뱃속으로 들어가는데 어디로 들어가는지 아니?”

“똥구멍으로요?”

“그래. 맞아. 닭장 안의 닭은 쥐들에게 노출되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나가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왜 이렇게 촘촘하게 그물을 짜는지 알겠지? 쥐가 들어올 수 없는 크기로 짜야해.”






문득 떠오른 이 이야기로 그대에게 되묻고 싶다.

“그대는 닭인가? 쥐인가?” 

쥐가 아님이 확실하다면 내 옆의 동료가 쥐에게 당하고 있음을 보고도 그게 나의 일이 아님을 모르는 닭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닭으로 산다. 

물론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말은 어떤가? 

<진리는 직시하기보다 외면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하나의 확증을 대라면 댈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곧 죽을 거란 걸 알지만 외면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다들 상상은 한다.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오늘만 생각하며 살 거야!” 외치거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얘기한다. 

하지만 막상 일상이 시작되면 우리는 우리 일상을 외면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닭장 안의 닭으로 살았다는 걸 이렇게 먼 섬에 와서야 보게 되었다. 


내가 희귀 질환으로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를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그리고 아내에게도 하지 않은 나의 절망을 형제들에게 제일 먼저 얘기했을 때 외면당한 경험이 있다. 술자리에선 심각하게 들어주더니 다음 날이 되자 나의 형제는 이 사실을 모른 척 행동했고, 그 후로 내 건강에 대해 묻는 걸 듣지 못했다. 

물론 다음 해에 다시 만났을 때 웃으며 건넨 이 말은 들었다.

“잘 지냈지?”


(뭘 잘 지내. 곧 죽게 되었다니까..... 이런 닭....)


난 이때 내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관계의 허망함에 대해 깨닫고는 더 절망했다. 

그리고 이 절망은 관계에 대해 직시할 힘을 나에게 주었다.  


몇 년 지나, 오랜만에 형제들을 다시 만났다. 

그때 난 그들의 눈빛에서 ‘곧 죽는다더니 멀쩡하게 잘 살아있네?’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의사의 오진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경과에 대해 물어주는 형제가 없었다. 

이때, 이들이 희망 없는 닭장 속 닭들이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오늘 깨닫는다. 

나도 아직까지 닭장에 갇힌 닭으로 살고 있었다는 걸. 

빈 서랍조차 참지 못하는 따위의 법집행을 나 자신에게 횡행하다니!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에이,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잖아요. 옛날에 CCTV가 있지도 않았는데 쥐가 그렇게 사냥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지어낸 얘기일 수 있어요.”


그러면 난 동물의 세계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들개와 하이에나가 들소를 어떻게 사냥하는지 보라고 말하고 싶다. 

하이에나는 들소의 불알을 물어뜯는다. 들소는 놀라 도망가지만 (무리의 보호를 받더라도) 결국 들소는 시간이 지나 과다출혈로 쓰러진다. 그러면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그 들소를 하이에나는 천천히 걸어가 잡아먹는다.     

나는 묻고 싶다.

그대의 똥꼬는 안전한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병든 닭들이 쥐들을 추앙하고 그들이 득세하도록 만세를 부르는 나라.


나는 그게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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