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22
새벽닭이 운다.
난 닭 우는 동네가 좋다.
닭소리에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닭소리를 소음으로 느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건너 집 새댁이 닭장을 만들기에 “닭을 키우시려나 봐요?” 하고 물어봤는데 이 새댁이 난색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 유정란이 하도 비싸서 직접 낳아 먹으려고요. 죄송합니다. 애가 알을 낳으면 맛보시라고 갖다 드릴게요.”
“몇 마리나 키우시는데요?”
“한 3~ 4마리만 키울게요.”
“하하하, 거기서 저희에게 갖다 줄 알이 있을까요? 괜찮습니다. 근처에 족제비가 많으니 닭장은 촘촘하게 잘 지으셔야 할 겁니다.”
그런데 어제 새벽 명상 시간, 새벽닭이 울 때 평상시와 다른 뭔가를 알게 되었다.
먼저 떠오른 의식은 ‘닭소리에 반응하는 내 마음은 평화로구나.’ 하는 각성.
그 뒤 명상을 이어가자, 몇 해 전 이웃 새댁과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떠오르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새댁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죄송하다.>는 언어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내 집에서 내가 닭을 키우겠다는데 왜 사과를 해야 하나?
그래서 오늘 오후, 이 이야기를 다시 주변에 물어보니 주변 사람들은 닭소리를 모두 싫어했다.
개 짖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고양이 소리도, 닭소리도 싫다는 거다.
특히 아침잠을 뒤척이게 하니 좋을 리가 있겠느냐며.....
하지만 개 짖는 소리와 달리, 닭소리에 대한 나의 감흥은 뭔가 특별한 것이 따로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다시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명상에 들어갔다.
‘넌 닭소리가 왜 그렇게 좋은 거니?’
공을 들이자 내면 아이가 나타나 말을 해 주었다.
“우린 할아버지 집에 있어요. 할아버진 닭을 키우잖아요.”
“우리도 한때 닭을 키웠잖아.”
“우리가 키운 닭은..... 내가 실수로 불을 내서 다 죽었잖아요. 그건 트라우마예요. 할아버지 집에서 듣던 닭소리가 난 좋아요.”
“할아버지 집에서 들었던 닭소리가 왜 특별하지?”
“아빠 엄마가 싸우지 않잖아요. 할아버지 집에서는 두 분이 얼마나 다정한데요.”
“아! 그렇지... 그랬지.”
“그리고 할아버지 집에서 잘 때는 우리 식구가 모두 한 방에서 자잖아요.”
“그랬지. 모두 한 방에서 자는 게 좋았구나?”
“그럼요. 집에서 평소 형들은 따로 자고, 부모님이 싸우면 나 혼자 그걸 견뎌야 해요. 동생은 너무 어려서 울고만 있어요. 나 혼자 아빠가 엄마의 목을 조르는 걸 막고 있어요. 울면서.....”
“형들은 도와주러 오지 않니?”
“그들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요. 아버지가 무섭거든요. 그리고 기차 소리도 좋아요. 할아버지 집에서는 기차 소리가 들려요. 동이 틀 때 멀리서 기차 오는 소리가 함께 들려요. 그리고 난 우리 식구가 모두 한 이불에 뭉쳐서 오순도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하며 다시 잠에 들어요.”
명상에서 깨어, 난 눈물을 훔쳤다.
우리도 마당에 닭을 키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곳은 족제비가 많아서 닭집 옆에 개를 함께 키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라오가 죽은 후, 밖에 재우지 않는다.
닭을 지켜주는 개를 한 마리 분양받고 싶지만 그 아이는 자기만 혼자 밖에서 잔다는 걸 분명 인식할 거다.
그러니 그 방법도 틀렸다. 닭을 집에서 키우는 방법도 있다.
그건 아내가 총 들면서 반대할 거다.
아무튼 이제 새벽 산책을 걸을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어느 아이 손을 잡고 걷겠지?
동반자가 생겨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