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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Dec 02. 2022

참호 일기

B통장

B통장.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알베르 카뮈-





세상에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나도 텃밭을 일구거나, 정원을 가꾸는 노동을 즐기곤 있다.

하지만 그런 노동은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노동을 하면서 영혼까지 보듬는 그런 삶은 극히 선택받은 일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 아닐까?


그러나 일반 노동자의 영혼에 상당히 위안이 되는 방법이 있긴 하다. B통장이다.

(B통장이 완전무결한 방법은 아님)


일반적으로 B통장의 정의는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통장, 즉 비밀통장을 말하는데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B통장은 비상(飛上) 통장이다.


어릴 때, 통장에 저금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뱃돈이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세뱃돈을 받으면 모두 부모님이 수거해 가셨다.

어린 나이이므로 돈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 부모가 잘 관리해 줄 테니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다는 논리였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말이 안 되는 논리다.

(그 이유는 시중에 수많은 관련 저서가 유통되고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이런 논리가 말도 안 되는 폭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알지 못하는 수입이 생기면, 비록 작은 돈이라도 그걸 바로 쓰지 않고 착실히 모아 규모의 돈을 만든 뒤 고리대금을 했다.

고리대금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형들 주위엔 늘 여자들이 있었다.

내가 10살 때 형들은 17살, 15살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형들은 여자 친구가 늘 있었다.   

(그러니 늘 주머니가 허전할 수밖에.....)


하루는 둘째 형이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날 보고 꺼지라는 손짓을 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형이 왜 그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첫째 형에게 여자 친구와 헤어진 얘길 하는 걸 우연히 엿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쟁자가 부자라서, 그 여성이 형을 버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형, 형 주머니에 만원만 있었어도 여자 친구를 그 녀석에게 뺏기지 않았을 거라며? 다 들었어. 그래서 우는 거지? 내가 그 돈 빌려줄게.”


그랬더니 꺼이꺼이 울던 형이 울음을 뚝 그치고 눈이 동그랗게 되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내게 물었다.

“네가 그 큰돈이 어디서?”

“그런 건 알 것 없고, 만원 빌려주면 그 여자 친구와 다시 잘해 볼 수 있는 거지?”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나중에 꼭 갚아야 해. 내 전 재산이란 말이야. 못 갚으면 어떻게 할 거야?”

“야!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냐? 동생 코 묻은 돈 빌려서 모른 척하게? 못 갚으면 두 배로 그다음 달에 꼭 갚을게.”


형은 결국 제 때 돈을 갚지 못했다.

 그리고 내 통장 잔고는 1만 원이 한 달 만에 2만 원이 되었다.

그 전에는 한 달로 따졌을 때 몇십 원씩 이자가 붙었는데 말이다.

이 경험으로 난 고리대금 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2만 원은 금방 10만 원이 되었다.  


형들은 그 돈 대부분이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형들은 늘 제 때 돈을 갚지 못했다. 그리고 제 때 돈을 갚지 못하면 그다음 달에 두 배로 갚는다는 원칙은 내가 세운 원칙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돈을 갚지 못했을 때도 큰 아량을 베풀어 이자를 더 받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3배 이상을 받아야 했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니 형들도 결국 내 돈을 도저히 갚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들이 무슨 일인지 재미있는 게임이 있는데 같이 놀자 했다.

그 게임은 <섰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한 두 개월은 바둑알로 놀았는데, 나는 서서히 <섰다>라는 게임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그 게임을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가 되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화투 그림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형들은 나와 같이 <섰다> 놀이를 하지 않았다.

<섰다> 하자고 졸라도 시간이 없다, 공부해야 한다, (공부? 언제 공부했다고?)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나를 피했다.  나는 너무 <섰다>를 하고 싶은 나머지 혼자 앉아서 가상의 상대를 앉혀놓고 <섰다>를 하곤 했는데,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형들이 어느 날 내 옆에서 화투판을 펼쳤다.


나는 너무 기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와! 오늘 드디어 시간이 나는 거야? 섰다?”


그랬더니 형들이 이렇게 말했다.

“넌 빠져.”

“왜?”

“넌 너무 어려서 재미가 없어.”

“나도 이제는 잘해!”

“그때는 세 명 숫자를 맞추려고 하다 보니 억지로 넣은 거지. 지금은 둘이서 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어. 넌 빠져.”

“왜? 내가 있는데 왜 굳이 둘이서 해? 나도 할래.”


그랬더니 작은 형이 화를 냈다.

“아! 정말! 이 자식이! 인마, 이건 원래 바둑알이 아니라 이렇게 현금 들고 하는 거라고! 넌 바둑알 가지고 다른 친구들이랑 놀아. 애들 끼는 자리가 아니야.”

“나도 현금으로 하면 되지! 현금은 형들보다 내가 더 많다고!”


이쯤 되면 이 결말이 어땠는지 모두 짐작할 거라 생각된다.

그렇다. 난 거꾸로 형들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형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차마 다 여기서 얘기를 못한다.


비상하고 싶다.


그때 이후로 난 놀음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참 저렴하게 교훈을 얻은 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때 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 경험을 하고도 지금 화투를 보면 ‘섰다’를 하고 싶다. 어릴 적 형성된 무의식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런데 정말 우스운 건, 명절 때 모이면 형들이 아버지와 함께 나를 왕따 시킨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들을 왕따 시키는 거지만....)

이유는 내가 놀음(포커나 고스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만나는 귀한 시간인데 만나면 거의 대부분 놀음으로 시간을 채우고, 여성들은 그 시간에 모두 중노동 하느라 기진맥진하고, 아이들은 심심해서 컴퓨터 오락만 하고 있고...... 그게 우리 집 명절 풍경이다.


그래서 한 번은 크게 마음먹고 (나 큰 병에 걸렸다고 말했는데 모른 척 한 뒤)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우리 이제 이런 포커나 고스톱은 한두 시간만 치고 대화를 하는 게 어떨까요? 과일과 차 마시면서 며느리들도 함께....”


그랬더니 형들이 대답하기 곤란해하시는 아버지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야! 인마! 누가 너보고 억지로 하랬어? 포커 싫으면 방에 들어가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어. 여성들과 함께 다정히.....”


난 형들은 포기한 지 오래였기에 아버지 눈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마지못해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이렇게 놀아. 아버지도 할아버지 만나면 우리 형제들하고 이렇게 놀았고. 이렇게 노는 게 명절이야. 이것도 대화라고. 무슨 할 말이 있어? 있으면 지금 얘기해.”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 돌아오시는 칠순 때 어떻게 할 건지, 사채 갚지 못해서 형수랑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큰형 문제는 어떻게 할 건지, 부모님 돌아가시면 장례는 어떻게 할 건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런 얘기 나누면 안 되나요?”


그랬더니 맏이 역할을 하고 있는 작은 형이 포커를 섞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 머리 아파. 그런 건 차례 지내고 술 마시면서 얘기하면 되지. 뭐 급해?”


하지만 차례 지내고 술상 차려진 옆에는 어김없이 놀음판이 펼쳐지고, 어머니까지 가세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이 분위기는 늘 작은 형이 주도하고, 부모님은 그런 작은 형을 예뻐한다. 그러면 작은 형은 그 예쁨 받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비웃으며 쳐다본다.

그 시선엔 자신이 주도하고 있다는 우월의식이 담겨 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효도한다 생각하자?

이게 효도인가? 


우리나라 효도의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부모가 자녀를 훈육함에 있어서는 모두 부모 마음대로 아니던가? 옛날 농사짓던 시절엔 부모에게 절대 권력 같은 게 있었지만 산업시대엔 다르다. 부모의 판단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지기 마련이고, 중년의 자녀들이 더 지혜로운 방안을 주도해 나가야 할 때가 많다.


아무튼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난 이제 집에 거의 가지 않는다. (제주도에 사니 이런저런 핑계 대기는 좋다.)

누구보다 아내가 행복해한다.

수년 전, 두 달 가까이 부모님을 모시고 산 게 마지막이다. 그때는 원 없이 함께 놀음도 하고, 여행도 함께 다니고 아침저녁 밥상도 차려드리고 했다. 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뒤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그 후 제주도로 내려온 뒤 정신이 반짝 들었다.


그곳의 삶은 제주도 같은 먼 섬에서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산다는 건,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나를 위하지 않는 사람들,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 자신만 옳다는 사람들,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 인간이 아니라 조직만을 위하는 사람들, 자기 자녀만 소중한 사람들, 자기만 잘난 사람들, 세월호나 이태원 사건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은 심지 없는 초와 같다.


이것이 B통장이 <비상하는 통장>으로 진화한 나의 경험이다.  

어릴 때 복구한 B통장은 지금 아내와 연애할 때 모두 썼고, 취업한 뒤 만든 B통장은 제주도 내려올 때 모두 썼다.


B통장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B통장은 아내와의 결혼으로 비상했고, 두 번째 B통장은 제주의 집으로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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