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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5. 2022

깊어가는 경사

2017. 11. 12.

2017. 11. 12. (BY 아내, IN 치앙라이)

오늘이 벌써 12일이라니......

치앙라이의 모든 사원은 다 가본 것 같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혼자 맛난 거 먹어도 되나 이런 생각 들면 이젠 그러지 말자 한다.

내 인생이 행복해야 내 옆 사람도 행복함을 이제야 알겠다.

태국 사람들은 친절하다. 길을 물어보면 따라오라 하고 팔짱을 끼면서 목적지까지 데려가 준다. 태국 사람이 가르쳐 준 친절로 인해 태국이 나의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친절이 어렵다.


저건 또 어떤 음식이래?
사원은 왜 간 거야? 사원에서 살건가?


남편도 잘 기다려 준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얼굴을 보여줄 때까지, 한 달이 될 때까지 잘 기다려줄 거라 믿는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태국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음이 편하고 나에게 나쁜 일도 안 생길 것 같고 그런 이유가 뭘까? 

남편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 하지만 지금은 혼자인 내가 좋다.




2017. 11. 12.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새벽 4시에 잠이 들어 늦잠을 잤다. 

8시 40분 기상. 늦은 기상이다. 

일어나자마자 애들에게 갔다. 

그런데 애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온통 우리 안을 똥오줌으로 가득 채워놓았다. 

온몸에 똥을 묻힌 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난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구석에 몰린 기분이 들어 주저앉았다.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 보란 듯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 앞에 펼쳐진 똥 천지 풍경은 완벽한 메타포였다.

똥칠을 하고도 뭔 짓을 한지 모른 채 웃고 있는 나와 다를 게 뭔가? 

완벽한 착각 속에서, 늘 뒤늦은 후회를 하며, 뒤늦게야 깨닫는 진실을 허공에 뿌리며, 어쩌면 그렇게 죽을지도 모른다. 

이가 갈릴 정도로 지겹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그 뒤에 펼쳐진 풍경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그걸 잊는다.


살짝 애들을 풀어놓고 키울까 생각이 든다. 그러다 사고가 나더라도 어쩌면 그 사고가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는데 그런 내가 아이를 키운다는 게 말이 되나? 

개똥 치우고, 개집 청소하고, 아이들 목욕시키고 나니 늦은 오후가 되었는데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난 내 밥그릇을 비운 채 아이들 밥그릇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결국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고 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영화를 틀었다. 엑소시스트를 보려고 한다.



2017. 11. 13.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나는 지금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를 들으며 시체처럼 누워 있다.

나는 지난날, 따뜻한 마음과 열려 있는 의식으로 나의 영혼을 채워주던, 다정한 손님들을 떠올리는 중이다. 그 시대가 나의 시대였다.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려고 숙박업을 접었는데, 나는 이제 완벽히 혼자다.

집 안을 가득 채운 적막의 휘장에 압사할 지경이다.

사람이 산 채로 관에 들어가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다.


아내가 여행을 떠나고 홀로 남으면 집으로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열어보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혼자 남으니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초대 전화도 귀찮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뚜렷하게 하나다.

따뜻하고 싶다, 추우니까. 


와.... 거긴 따뜻하구나!


오후 5시 30분.

이제는 이 시간에 벌써 해거름이 지난다. 나는 미처 불을 켤 여유도 찾지 못하고 글을 쓰다 어둠을 맞는다. 

오늘도 밤이 되면 영화를 본다.

오늘 본 영화는 <대학살의 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고 어른 싸움에서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줄거리다.

분노는 때로 위선과 가식을 부수고 삶을 직시하게 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부부들은 결국 자신들의 점입가경인 불행한 부부관계를 떠벌리게 된다.

토하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방방 뛰더니 절망해 쓰러진다.   


이 와중에 예전 방문했던 손님 한 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페이지 유 덕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상견례 사진을 보내왔다.

아내에게 온 연락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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