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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2. 2022

나, 다시 돌아갈래...

2017. 11. 04.

2017. 11. 4. (BY 아내, IN 치앙마이)

살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처음 제주에 갔을 때처럼.




2017. 11. 4.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아침 페이스톡을 넣었는데 오늘도 받지 않는다.

페이스톡은 늘 내게 걸려오면 내가 받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은 무슨 뜻이고 하니 아내는 페톡 하기 전 맵시를 다듬고 원하는 시간에 톡을 하고 나는 불시에 검열받듯 톡을 한다는 뜻이다.

그마저도 하루 종일 폰만 쳐다보고 있어야 제 때 전화를 받을 수 있다.

왜 내가 페이스톡을 걸면 받지 않는 걸까?


우리 살 집을 보라니까.... 이런 데는 왜 간 걸까?


(오후)

라오가 내 발가락을 핥고 있다. 정말 행복하다.

라오 옆에 아내를 놓아보았다.

세상의 아내들은 이사 갈 때 남편보다 강아지가 우선순위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이해가 간다.

라네와 라오를 보면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정말 다르다.

라네는 먹성이 너무 좋고 내가 어떤 명령을 내리면 라오보다 늘 한 발 느리게 반응한다.

라오가 달려가면 뒤따라가는 스타일이지, 라네가 먼저 뛰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라오는 내가 앉아 있으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 가만히 들어와 앉고는 전방을 주시한다. 이런 건 모로에게도 발견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끈기 있게 내가 일어나 다른 일을 하기 전까지 자세를 유지한다. 라네는 모로 옆에 누워 있다. 라네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가 보다.  모로는 내 근처 어딘가에 늘 자리 잡는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는 라오가 있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자 아무래도 라오에게 점점 더 감정이 깊어진다.

마당 잔디에 누우면 라오만 가슴에 올린다. 라오는 어릴 때부터 내 목젖을 좋아했다.

라오가 목을 핥아주고 빨아주면 그게 종가시 나무의 입술이 되고, 바람의 혀가 된다.    

라오가 너무 예뻐서 진하게 뽀뽀를 해 주면 라오는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 쇄골에 가로눕는다. 라오의 숨소리, 라오의 호흡이 목깃을 간지럽힌다.

그렇게 잠에 빠진다.


아주 잠깐 머무는 황홀의 추억.




2017. 11. 05. (BY 아내, IN 치앙마이)

여행 출발 후, 일주일이 지났다.

어제저녁엔 갑자기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기 시작해서 타이레놀 두 알로 해결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 다행이다. 무리한 것도 있다. 생전 잘 걷지도 않던 내가 거의 매일 두 시간 정도는 걸어 다니고 있다.

남편도 나름 잘 지낸다. 나 없이도 이제 잘 적응한 듯하다.

출발할 때 한 달 뒤엔 반드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행 1/4이 지났는데 생각보다 느끼는 게 많다.

혼자서도 나는 잘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신감도 든다.

혼자서 잘 산다고 하여 남편이 불필요한 존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그냥 거의 나와 일치된 존재가 아닐까? 없어서 편하거나 없어서 허전하다거나 그런 감정은 아니다.    


일치된 존재? 그대의 얼굴에 걸친 선글라스겠지....


내가 부대찌개만 5끼 먹고 있을 때, 아내는.....




2017. 11. 05.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정말 희한한 꿈을 꿨다.

보통 꿈은 깨고 나서 다시 자면 이어지지 않는데, 이번에는 3번 깨고 다시 잠들어도 같은 꿈을 꿨다.

이 꿈에서 나는 매춘부가 일하는 업소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꿈에서 깨고 나니 그런 쪽 삶이 오히려 부러웠다. (하긴 20대로 돌아갔으니....)

너무 재미있는 시간이었고, 지금보다 더 사랑을 많이 받는 삶이었다. (물론 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이 매춘부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사랑이었다.


날 고용한 포주는 포악한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손님에게 우리 쪽 여성을 홍보하는 일이었다. (삐끼)

무엇보다 매춘하는 여성들의 세계를 엿보다니!

이건 기적이다. 더구나 꿈이 너무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포주가 돈을 쓸어 담는 장면이었다.  지역 경찰 접대하는 부서가 따로 있고, 관리 지역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청소하는 부서도 따로 있고, 매춘부 건강을 전담하는 직원과 회계 관리까지 부하들이 다 알아서 일하고 포주는 컴퓨터로 그날 수입 증감의 원인 정도를 부하에게 물어보는 정도만 하면 일주일에 수 억이 그의 통장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치인 같은 거물은 포주가 직접 상대하는 걸 알았다. 포주는 그런 걸 눈치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엄청 많이 버는 것 같아도 저 도둑놈(정치인, 판검사, 고위공무원, 언론인)들 주머니로 절반 이상 새들어 가는 거야. 저 놈들이야 말로 무위도식하는 세상 악질 도둑놈들이지. 저 악질 도둑놈들 중에 제일 악질은 검사야. 아는 검사 한 명만 있어도 뒷배가 든든해지지. 경찰은 그 가운데 제일 핫바지인데 푼돈에도 잘 넘어가니까 뭐..... 아무튼 세상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 좋은 대학 보내고, 고시 합격한 사위 보려고 안달 내고 그러는 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시간에 여기 와서 푼돈 벌겠다고 일하는, 너희 같은 아이들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말이야. 불쌍해 죽겠어. 그래서 내가 너에게 플러스 용돈 주고 하는 거야. 잠시만 여기서 일하고 주머니 넉넉해지면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나, 다시 돌아갈래!


꿈이 너무 생생해서 꿈에서 깬 뒤에도 잠시 난 대학생이었다. 난 포주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마음속에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다. 이제야 비로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위대한 도둑놈이 되고 싶어졌다.

매춘부 소굴이야말로 진짜 학교가 아닐까?


해가 새로 돋고 있으니 공부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생 이런 적이 없었지.)

‘도서관 가야지. 가방 어디 뒀더라?’

하다가 여기가 제주도라는 걸 깨닫는데 한참 걸렸다. 방 안 풍경이 생소하다.


날 챙겨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달랑 혼자다.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켜보면 어릴 때 나에겐 <꿈의 포주> 같은 존재가 없었다.  다시 뵙고 싶은 스승도 없고, 집에선 늘 사각지대에 홀로 있던 기억뿐이다. (나중에 직장에서 알았지만 면도하는 방법도 몰랐다.)  학창 시절에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인복은 없었다.

세상엔 살아있는 지식이 따로 있는 법이다.


이제 꿈에서 만난 포주의 나이가 된 나는 확실히 안다.

이 세상이 그때나 지금이나, 꿈에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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