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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0. 2022

갈등의 서막

2017. 11. 01.

2017. 11. 1 (BY 아내, IN 치앙마이)

오늘 비로소 즐기는 중이다. 재작년에도 남편과 함께 님만 해민에 머물렀었는데 이번이 훨씬 좋다.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그때 우린 왜 그리도 헤맸을까? 좀 더 마음 편히, 좀 더 여유롭게 다녀도 되었을 텐데, 뭔가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밀려왔고, 그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풀면서 여행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아침에 커피만 두 잔째다. 두 군데 커피숍을 들렀는데 <OMBRA>만이 합격.

님만의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관광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님만의 구석진 카페에서 이 일기를 쓰고, 제주의 구석진 집에는 남편이 있다.

이곳 길은 지저분하고 먼지도 많지만 모든 집이 다르다. 모든 건물이 다른 색, 다른 마감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운 게 신기하다.   

한 달이 지나면 무엇이 남을까? 분명한 건 한 달 후 그리움이 남을 거란 것.

남편, 제주, 우리 강아지들에 대한 그리움과 치앙마이에 대한 그리움, 건조하고 살짝 더운 날씨에 대한 그리움.

그립기 전에 즐기라고 또 압박이 몰려온다.




2017. 11. 1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부대찌개를 만들었다.

평소 먹고 싶던 대로 (아내의 입맛이 아니라 내 입맛대로) 마음껏 돼지고기 넣고 파도 쏭쏭 썰어 넣고 푸짐하게, 얼큰 달달하게 끓였다.

요리하는 데만 1시간 반.

아침 애들 산책시키고 와서 밥 주고, 정원에 물 주고 하면 또 한 시간 반.

그래도 시간이 남아돈다. 텔레비전 빈자리에 자꾸 눈이 감.

결국 빔 프로젝터에 선을 연결해 봄. (앗싸! 된다!)

오후엔 종일 책을 읽고, 빔 프로젝터 연결한 후엔 바둑과 영화 봄.

TV 보는데 삼시세끼 유해진 편에서 이런 표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더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아내에게서 페이스 톡 왔는데 (과일 먹으면서) 여기서는 감히 사서 먹지 못할 그런 과일을 먹방 하며 페이스 톡이 왔다.


뭐야, 상대가 잘 먹고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소심해진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숙제는 잘하고 있지?

그랬더니 인사도 안 하고 영상을 툭 끊어버린다. (수화기 너머 정적이 너무 무서워졌다.)


그래서 무서움을 무서움으로 달래려고 무서운 영화를 검색했다.  늦게 까지 영화나 봐야지. 평상시 아내 때문에 보지 못했던 영화....

“기생수”을 골랐다. 괴물 나오는 영화다.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야한 영화는.... 정말 견디기 힘들 때, 시공간이 너무 방대해졌을 때....  히든카드로 남겨두기로 함.




2017. 11. 02. (BY 아내, IN 님만)

사람이 참 간사하다. 커피 100밧이면 싸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마셨는데, 이제 자꾸 다녀보니 50밧 짜리도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이상한 건 이 낯설 수 있는 환경이 무섭거나 낯설거나 힘들거나 걱정되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어떤 곳을 여행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잠시 이곳이 집 앞 카페인가 싶기도 할 땐 태국 현지인에게 말을 건다.

바보같이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에서 헤맸지만 그 덕분에 애초 행선지보다 여기가 더 좋은 곳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하다 못해 자전거라도 빌려 타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걷는 게 더 좋아졌다. 다행히도 숙소 위치가 모두 걸어 다니기에 나쁘지 않다.      

이렇게 다니다 보니 나란 사람은 <여행지에 살다 온 여행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도 이런 여행을 너무 권하고 싶다. 혼자 다녀오라고, 길게!


그나저나 어제 남편이 한 말이 신경 쓰여서 여기 살면 어떨지 비로소 눈여겨보는데 이상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나이 든 서양 남자와 젊고 예쁜 태국 여자 커플이 여긴 너무 많다.  나이 차이가 40살 정도는 될 텐데 손녀 같은 아이를 와이프라며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자꾸 눈에 거슬려서 아무것도 못하겠다. 워낙 자주 보다 보니 그것도 여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산다고 무슨 범죄행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거부할 수 없게 거슬린다.

남편이 여기 와서 저렇게 지내면? 바로 사형이지. 총살!




2017. 11. 2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어제 자기 전에 결심한 게 있었다.

애들 집 청소해 주기.

아닌 게 아니라 섞인 유전자라고 해도 웰시코기답게 탈모가 장난이 아니다.

더하기, 나무 뜯어 놓은 것과 흙들을 모아 놓아서 개집이 아니라 야생 늑대 집이 되었다.

집 청소한다고 먼지 폴폴 날리는 동안 라네와 라오는 쉬지 않고 마당 마라톤 중....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모습, 바라만 보아도 웃음이 나온다.)


이런 걸 행복이라 말해도 좋겠지?

(조금 전 모로 집 청소를 까먹은 걸 떠올리고 다시 나가서 청소해 줌. 개 먼지 대박, 눈에 흙이 들어가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음)

애들 이불 널어주면서..... 이게 개 이불이 아니라 내 아이들 이불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봤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아내는 한 달 여행은 꿈도 못 꿨을 테고, 나는 어느 직장을 또 노예처럼 다니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 삶의 위치나 방향은 훨씬 명확하고 따뜻하지 않았을까?

많은 남자들이 청혼할 때 “내 아를 낳아도!”라고 하지 않던가?


우린 7년 연애에 지쳐서 이렇다 할 프러포즈도 없이, 이별의 명분이 없다면 숙제의 끝을 본다는 심정으로 결혼을 한 셈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계절은 또 돌고 돌아 가을이 왔다.

제주에 올레를 오고 (올레 여행 중엔, 제주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또 이곳에 터를 잡기로 결정한 시기가 모두 이 즈음이었다.


..... 집 앞으로 또 승마하는 사람이 지나갔다. 달려 나가는 모로를 붙잡지 못했다. (라네와 라오는 다행히 붙잡았다.) 다행히 서로 간에 불미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모로도 상냥했고 저쪽 관람객도 웰시코기를 알고 있었다.) 모로를 혼내고 벌세우는 중이다. (묶어둠)

아.... 통제가 안 되는 개 3마리!

요즘 가뜩이나 개 사고가 가십거리가 되는 세상이 되어 살기 불편해졌다.

이 모든 걸 내게 맡기고 한 달 살이라니!

그때 이 여행을 허락해 준 건, 태국에 정착할 정보와 신념을 확인하는 차원이었는데 오늘도 미란은 지인들에게 자랑하느라 바쁘다. (페이스 북)

약속을 어기는 이런 행위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오늘 저녁에도 무엇 좀 알아낸 게 있냐고 물어보니 슬리퍼와 과일 쇼핑하느라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 그녀가 돌아오면 이런 일방통행의 부부 관행을 끝장 낼 생각이다.


수확이 한창인 제주 들녘, 수확 없어 보이는 아내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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