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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18. 2022

2017년,  그 해 가을

아내의 그림

2017년, 그 해 가을


2017년은 제주의 참호를 떠나 새로운 참호 설계를 구상한 첫 해였다.

제주를 떠나려고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무렵 제주의 급변하는 환경이 참호 기능 상실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참호는 어디로 정해야 할까? 그게 2017년 우리의 최대 숙제였다.


2017년엔 모로가 옆집 개와 눈이 맞아 딸만 여섯을 낳은 사고가 발생한 해이기도 했다.

사고란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우리는 모로의 중성화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린 마당이 넓고 모로와 함께 자택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자궁을 없앤다는 발상이 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고가 발생한 그날 우린, 따뜻한 봄볕을 즐기도록 모로를 마당에 놓아두고 봄맞이 정원 정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 낮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집 앞 사거리에서 모로의 비명이 들려왔다. 길 쪽으로는 우리의 허락이 없으면 나가지 않는 훈련을 해 왔기 때문에 안심한 게 실수였다.

하던 일을 버려두고 급히 길로 뛰어나가니 가관이었다.

사거리 한가운데에서 키 큰 레트리버 똥꼬에 다리 짧은 모로의 똥꼬가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급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지난 후였다. 어쩔 수 없었다.

쭈그리고 앉아 모로를 안은 채 레트리버 키에 맞춰주며 자연스럽게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품에 안은 모로를 보니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흔적이랄까, 눈물이 흥건했다.

그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모로의 마음을 훔친 사위가 너무 미워서 그의 불알을 꼬집었다.

그랬더니 감히 장인어른에게 으르렁 거린다. 장인어른은 떨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장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구경했다.   


그뿐인가? 수컷이 대형견이면 출산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결국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모로의 자궁을 드러내기로 다.

모로의 딸들은 우리가 데리고 모두 키우자는 내 주장과 한 마리만 키우자는 아내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라네와 라오, 둘 만 우리가 키우기로 한다.  


레트리버와 웰시코기 합체


라네, 라오가 내 목젖을 엄마 젖처럼 빨면서 애정을 키워갈 무렵, 가을이 왔다.

아내는 그동안의 피곤이 몰려왔는지 갑자기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괜찮겠냐는 말을 건넸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 표정을 보니 내가 안 괜찮다고 해도 가겠네. 그지?”

“응, 그런 자세 아주 훌륭해.”

“그래.... 잘 갔다 와. 그런데 30여 일 동안 놀기만 할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도 우리 여기 제주 떠나면 어디 갈지 고민했잖아. 우리 이다음에는 태국에서 사는 건 어떻게 생각해? 이번에 한 달 동안 지내보고 괜찮은지 좀 살펴볼게. 그리고 기왕 가게 되면 어디가 좋을지도 알아올게.”

“오! 그런 큰 그림이 있었구나. 부디 그 약속은 꼭 지키길!


그녀의 여행 D-DAY는 10월 3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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