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유 Nov 19. 2022

사선의 시작

2017. 10. 30


2017. 10. 30. (BY 아내, IN 방콕)

인천공항! 그리웠던 너!

드디어 떴다. 비행기.

지금은 방콕.




2017. 10. 30.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홀아비 한 달 살기 미션 첫날.

아내 없는 첫 아침,

거울을 보니 수염을 깎아야겠다 싶다.

홀아비 신세가 되었지만 더 잘 먹고 잘 씻고 재미있게 지내자.


아침에 영상통화..... 아내는 방콕에서 아침을 맞았다.

무사히 도착하고 잠도 잘 잔 것 같아 보인다.

표정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 기분이 별로다.

이렇게 둘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처음이라 그런지 막연한 걱정만 앞선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여행 허락한 걸 후회한다.


점심엔 국숫집에서 고기국수를 먹고 유채와 무 모종을 사 왔다.

시장도 봄. (돼지고기, 소고기, 마늘, 상추,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오이)




2017. 10. 31 (BY 아내. IN 치앙마이)

여행 이틀째다. 사람 사는 것은 모두 같은 건가?

돈이 조금 더 들거나, 덜 드는 차이 일뿐 사는 모습은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상식 같은 아주 작은 차이가 문화의 차이로 이어지고, 그렇게 발생한 문화의 차이가 그 집단 전체의 모습을 정의하는 걸 목격한다.

남편은 잘 지내고 있을까?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궁금하다.

나중에 남편이 여행을 떠나고 내가 남았을 때 남편도 나처럼 마음이 어지러운 채 첫 날을 맞이할까?




2017. 10. 31.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아내 없는 빈 집은,

도시에서 지낼 때와 제주도 외딴 촌구석에서 지낼 때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았다.

맞벌이를 하며 도시에서 지낼 때 아내가 출장으로 며칠 씩 집을 비우면, 즐거워지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느라 애썼던 기억이 난다.

반대로 아내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 되면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껏 즐기던 것들에게 이별 인사를 해야 했다.

마음껏 오락하고, 마음껏 늦잠 자고, 마음껏 어지럽히고, 마음껏 야한 동영상을 봤지.

특히 야한 동영상은 TV로 봐야 제 맛인데 말이다.

그런데 엊그제 아내가 태국으로 여행을 가고 제주도 촌구석에서 홀로 달빛과 마주하니 마당이 더 넓게 느껴지고 남쪽 하늘로 눈길이 가는 걸 어찌할 수 없구나.

그나마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모로가 낳은 라네와 라오를 돌봐야 한다는 숙제.

이 숙제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곁에서 사라진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법이니까.....


참고로 아내는 여행을 떠나기 전, 여느 아내들처럼 곰국 같은 걸 끓여놓지는 않았다.

다만 텔레비전을 중고로 팔았다. 참 무서운 여자다.

‘세상의 다른 아내들도 그녀처럼 무서울까?’ 하며 이불을 덮는다.


이불 덮고 가만히 생각하니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를 거라는 어떤 조롱이 들려온다.

‘나는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했다고 말해도 될까? 무서운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사랑하는 대상을 무서워하는 게 맞는 걸까? 어떤 사랑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 사랑은 그럴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내에 대한 나의 감정 가운데 무서운 감정은 일부분, 그 외 다른 감정 15가지가 있다고 했을 때 무서운 감정 하나로 그 사랑은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내 외에 사랑하는 대상은 있는가? 종가시나무를 사랑하는 마음, 이것도 사랑에 포함되는 걸까? 나는 종가시나무의 목을 따는 포클레인을 보고도 막지 못했다. 다만 슬퍼할 뿐, 다만 좌절할 뿐, 종종거리기만 하결국 되돌아섰다. 이런 걸 두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 즐기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두 합하여 한 자리에 모여도 그걸 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느낌이 든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인류 대명제에 대하여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펜을 잡고 노트 앞에 선 나 자신을 조롱하며 펜을 놓는다.

이전 01화 2017년, 그 해 가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