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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4. 2022

나는 말라가고, 너는 파릇하구나.

2017. 11. 07.

2017. 11. 07. (BY 아내, IN 치앙라이)

역시 치앙마이보단 치앙라이가 좋다.

적절한 거리에 백화점이 있고 매일 열리는 야시장.

주말엔 대형마켓, 차로 30분이면 멋진 뷰포인트가 많고 치앙마이보다는 사람이 적다.

게다가 길이 깨끗하고 골목골목 다니기도 더 좋다.

태국 사람들도 여전히 친절하고 밝다.

겨울 시즌만 여기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내일은 진지하게 콘도랑 아파트 알아볼 예정이다.

오늘도 야시장 가서 과일 사야지.

일정을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니까..... 왠지 치앙라이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다.

숙소도 좋아서 놀다가 숙소에 들어가서 한숨 푹 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물가도 싸고 마음도 편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밤이 되자 남편이나 집에 대해 깜박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다.


집을 잊을만하네....




2017. 11. 07.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갑자기 어떤 남자에게서 아는 체하는 문자가 왔다.

이름도 폰 번호도 처음인데 다짜고짜 연주 씨(예전 단골손님) 친구란다.

좀 당황해서 자세히 물었다.

그랬더니 번호도 바뀌고 이름도 개명해서 그렇다고 정중히 사과한다.

“그럼..... 혹시 예전 연주 씨랑 함께 왔던 원호 씨예요?”

“네. 맞습니다. 지금 제주도인데 내일 잠시 방문하고 싶어서요. 혹시 내일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실는지요?”


그는 이름이 민철로 바뀌어 있었다.

첫 만남 때 인상이 좋아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불쑥 한 밤중에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거는 건 불편하지만, 내일 하루 기꺼이 시간을 내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전화와 달리, 정작 연락을 줘야 할 아내는 점점 단답형의 문자만 남긴 채 무소식이다.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혼자 자유롭게 지내고자 떠난 여행인데 너무 간섭하는 것 같아서 전화를 거는 건 망설여진다. 이제 겨우 8일째인데.....

안전하다는 증거로 문자만이라도 자주 남겨주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여행에서 아내가 돌아오면 이 일기를 보여주리라!


나는 말라가고, 너는 파릇하구나.



2017. 11. 08.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오늘도 아내는 연락이 없다. 페이스북에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국이 안전한 나라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민철 씨는 여전히 인상이 좋다.

오는 길에 들렀다며 오설록 케이크와 녹차라테 2개를 사서 왔다.

제주에선 빵이 귀하다. 센스 있는 친구라고 생각됐다.

왜 이번엔 혼자 왔느냐 하니 연주 씨와는 그렇게 진지했던 사이는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이제는 만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자세한 사연은 묻지 않았다.

거실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근처 오름에 올랐다.

남자 둘이서 좀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보다 정말 좋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헤어지고 난 뒤 이런 문자가 왔다.

“진지함과 편안함, 이 모두를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형님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흐뭇했어요.”

그냥 뱉은, 형식적 인사치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줬다.

“다음엔 민철 씨 소개해 드릴 여자 친구가 근처에 생기면 좋겠네요. 진지함과 편안함에 흥분도 더 할 수 있도록..... 민철 씨에게 행운이 건너가길 기원합니다.”

이때 까먹고 있던 선물이 떠올랐다. 민철 씨가 오늘 가지고 온 오설록 아이스크림 케이크!

케이크 한 입에 아내에 대한 걱정을 까맣게 잊는 것 같다.



2017. 11. 09.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애들 산책시키고 정원에 물 주고 (비가 너무 안 온다. 제주는 심각한 가뭄 중.....)

빨래를 하고 간단한 요리(고등어 김치찌개)를 한 뒤 점심식사를 마쳤다.

하루하루가 거의 이런 일상이다.

사람들을 지금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만나서 하루를 좀 더 멋지게 창조하며 지내자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접었던 손님을 다시 받기로 했다. 아내가 없는 기간만이라도.....

오늘은 한경 도서관 독서모임 첫날이다.



2017. 11. 10.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어제 독서모임에서 만난 회원들은 나에게 흥분을 안겨주지 못했다. 모두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다.

어제 예약 한 손님을 오늘 만났는데 상당히 이상한 여성 손님이다. (두 명)

사전 연락했을 때는 밤 9시쯤 들어온다 했다가 갑자기 연락 와서는 7시 전에 들어온다고 하고, 금방 또 나간다고 했다가 한참 방에서 수다만 떤다. 한창 시끌벅적하다가 2시간 뒤에 말도 없이 나가더니, 결국 12시 다 돼서 술 마신 관계로 다른 숙소를 잡았다는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어떤 남성 관광객들 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낯선 여행지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이성이 자기네 숙소로 초대를 한 모양이다.

체크아웃 확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아까 한창 수다 떨면서 어지럽힌 과자봉지, 뭘 흘렸는지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걸레로 쓴 흔적, 그리고 마구 짓이겨 놓은 이불로 엉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떻게 마치 다시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짐을 모두 챙겨나갔느냐 하는 거였다.

미스터리다.

아..... 모르겠다. 내일 치워야지.



2017. 11. 11.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오늘 빼빼로 데이인가?

어쨌거나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꾼 꿈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다.

다시 입대한 꿈이다.

병원에서 부대 복귀했는데 후임이 갑자기 나에게 사령관 점호 보고를 맡겼다.

그런데 사령관 점호 보고를 어떻게 하더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황해서 실수를 연발하는 나를 보면서 부대원 전체가 조롱하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 기도를 했다.

“세상을 조롱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미란은 (이곳 사정을 알 리 없겠지만) 이제 다시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있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어딜 가는가 보다.


아주 꽃길만 다니셨군, 그래.


애들은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에 이제는 집에 들어가서 잔다. 잘 먹고, 말 잘 듣고, 잘 싼다.

하지만 난 광장 위에 심판받는 자들과 함께 조롱조롱 매달린 느낌이 든다. 자책하는 습관을 어떻게든 치유해야 할 텐데 방법을 모르겠다.


이제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끼니 차리고 먹는 것도 귀찮아져서 한번 먹을 때 엄청 많이 먹고 하루를 견딘다. 식욕은 의미를 잃고 만사 무기력하다.

이대로 그냥 생을 마감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번 삶은 아무래도 실패 같다.   


저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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