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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Dec 11. 2022

참호 일기

2022. 11. 21.  상상놀이

물리는 일에 대해 상상한다.

물리는 것. 이빨 자국이 남겨지는 것.


이빨 자국은 사라졌지만 물림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10살 때 동네 개와 연관되어 있다.

아랫집 동무와 딱지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바람에 날아간 딱지를 줍는 순간, 근처에 있던 그 집 개가 내 손을 물었다. 엄지 금성구 쪽이 거의 관통당할 정도로 큰 상처였다.

바로 집으로 가 엄마를 찾았지만 집엔 아무도 없었다. 방에 누워서 다친 손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때 그런 나를 발견한 어머니께서 병원에 데려갔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 몇 개월 지나 손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심정지 상태가 되어 사망선고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곧 다시 숨을 쉬게 된 뒤로, (사후세계를 경험한 뒤) 죽음이란 명제는 늘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물리는 경험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신을 만났으니 말이다.


최근 또 다른 물림도 있다는 사실을 남미에서 만든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입술을 깨문다. 그러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남주인공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되어 더 격렬하게, 더욱 뜨겁게 키스를 퍼붓더니 정사를 나눈다.

정사를 나누는 도중에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허벅지를 깨문다. 여주인공은 화들짝 놀라며 남자 주인공의 대갈을 때린다. 그러더니 깔깔거리고 웃으며 다시 정사를 이어간다.

<이게 뭔가? 미쳤나? 남미식?> 

저건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정사가 아닐까? 실제 존재한다고? 작가의 경험인가?

너무 이상한 비약이지만 저 수위 정도의 정사를 나누지 못한 자는... 혹시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난 저런 장면을 보면 콤플렉스를 느낀다. 나는 경험하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경험했을 미지의 세계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상상만이 내 글이 살 길이다.


그래, 깨무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상상해보자.

그녀가 내 팔뚝을 무는 것. 그녀 허벅지의 두툼하고 말랑한 부분을 콱 깨무는 것, 거기에 이빨 자국을 남기는 것, 그 흔적, 가지런하고 중간에 움푹 파여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각이 환기되는 자국, 너무 아프지 않게 물기에 대략 3일에서 5일 정도면 사라지는 흔적, 이빨을 느끼는 것, 물릴 때의 희열, 아니면 물 때의 희열.


내가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내 연인에게 “물어줘.”라고 부탁하겠다. 아무래도 내가 무는 건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니까.....


어떤 감각은 반드시 흔적이 남기 때문에 실재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물이 뜨거운 줄 모르고 내 발을 담가서 남은 화상의 흔적. (백일도 안되었을 때 생긴 화상인데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환기가 된다. 지금도 뜨거운 물, 뜨거운 밥은 무섭다.)


또 어떤 감각은 감각을 통해서만 기억된다. 예를 들어 아내의 허리를 처음 만졌을 때 그녀가 내 뺨을 때린 기억이 있어, 지금도 난 그녀의 허리를 만지는 게 좋다.

(물론 지금도 그녀는 허리 만짐을 여전히 싫어하지만 내 뺨을 때리지는 않는다.)


아쉽게도, 너무 아쉽게도 그녀에게 그때 날 물어달라고 부탁했어야 함을 돌이켜볼 때, 지금의 나에겐 상상하는 힘만이 유일한 위안이 된다.


우연히 찍힌 사진... 정체가 뭔지 모른다. 상상하라.


지금이라도 물어 달라, 부탁해 보라고?

해봤다. 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도대체 요즘 무슨 영화를 본 거냐고 불쌍한 듯 쳐다본다.


날 너무 잘 알아서 그녀가 무섭다.


아무튼... 물리는 일에 대해 상상하다 보니, 문득 난 출혈 관리 대상이란 사실도 떠올리게 된다.

내가 먹는 약, 와파린(항응고제) 같은 나트륨 계열의 약은 부작용이 많다. 백혈구 감소도 그 부작용 가운데 하나기 때문에 늘 면역력을 키우는데 힘써야 한다.

그 외 부작용이 많아서 차라리 약을 끊고 죽자, 결심하고 제주도로 내려온 뒤 오히려 건강해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약을 끊으니 백혈구 활동이 왕성해졌고, 그런 영향이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었다. 사실 내 몸 안의 다른 쪽에서는 유전질환 징후가 끊임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물론 건강한 환경이 내 몸에 끼친 선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아주 잘 지낸 편이다. 감기도 별로 앓지 않았고 심지어 코로나도 한번 거쳐 가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하지만 노화는 어쩔 수 없. 날이 갈수록 점점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신약이 개발된 걸 알게 되었다.

이 약은 엘리퀴스(아픽사반이라고도 불린다.)인데 적은 용량으로도 혈전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 약에도 나트륨이나 마그네슘 계열의 첨가제가 들어있긴 마찬가지다.

라우릴 황산나트륨은 비누 거품 효과를 내는 화학물질이고, 스테아르산 마그네슘은 유화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이다. 그 외에도 그로스카멜로오스 나트륨 같은 예민한 화학물질이 첨가되어 있다. 용량을 초과하면 바로 발암이 되기도 하는 이런 독극물이 누군가에게는 약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약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증상완화제이지 결코 치료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이 신약을 처방받아서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바로 먹는 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중이다. 이 약을 먹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혈전이 없어진 징후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하지정맥이 막혀서 종아리에 부종이 발생했을 때 이걸 먹으면 통증이 사라지고 부종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 효과가 영구적이진 않다.

물론 이 약도 부작용이 있다. 와파린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불편할 정도의 부작용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피부 건조증이 발생하기 때문에 건조한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을 늘 챙겨놓아야 한다.  


아무튼,

나는 물리는 상상을 하다가, 물린 자국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는 상상까지 하고 만다.

현실이, 내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가 즐거운 상상놀이를 스릴러로 바꿔놓은 셈이다.


이럴 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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