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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Apr 30. 2024

참호 일기

2011. 12. 03. 9'th Life.

2011년 12월 2일

제주로 이사를 온 뒤 첫겨울을 맞는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겨울이다. 집 설계를 하면서 첫 번째 겨울을 보냈을 때 제주도 겨울이 의외로 혹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겨울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과 난방 효과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주도 난방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설계할 때부터 난로를 추가해서 넣었다.

난로는 고민 끝에 현무암으로 만든 난로를 선택했다. 값은 일반 난로보다 3배 비싸지만 10배 오래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 주석 난로는 주물이 얇아지다가 결국 구멍이 뚫리곤 해서 오래 쓸 수 없다. 하지만 돌로 만든 난로는 거의 반영구적이다. 그리고 돌이 열기를 오래 품고 있기 때문에 밤사이 불이 꺼진 뒤에도 난로는 새벽까지 따뜻하다.


그러나 설계할 때 체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2층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잠자는 방은 2층에 있다. 난방을 틀자니 한 달 60만 원이 넘는 기름 값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아쉬운 부분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다 화로를 하나 주문했는데 그 화로가 오늘 도착했다.

난로에 남아 있는 숯을 화로에 담아 2층으로 가져가면 난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011년 12월 3일

해가 지고 나서 2층으로 가져갈 숯을 만들기 위해 도끼질을 하지 않은 굵은 장작들을 저녁부터 태웠다.

난로의 문을 열자 시뻘건 숯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 마음도 숯처럼 시뻘겋게 타올라 기대에 차올랐다. 화로에 담긴 숯은 이내 숨을 가라앉히고 침대에 누운 신혼 새댁처럼 남실거렸다. 사랑스러웠다.


살아 태양을 품고, 죽어 태양이 되는 나무


이제 우리 집에 온 지 8개월 된 모로와 우리는 2층 안방에 화로를 갖다 놓고 한 동안 그 열기를 감상했다.

세상 모든 불빛이 숨어든 가운데 오직 화로만 봉긋 묘한 조명을 내고 있다. 뭐랄까, 노을이 화로에 담겨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모로도 잠들지 않고 우리를 관찰했다. 모든 게 따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잠이 몰려왔을 때 잠꼬대처럼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화로 때문인지 노곤하네. 좋은 꿈 꿔.”

그러나 아내는 이미 잠에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오늘따라 내 몸은 구름을 탄 것처럼 둥실 거리기도 하고, 깊은 물에 잠겨 가는 것처럼 무거웠다.

잠결이지만 이 모든 걸 느끼면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 꿈결에서 외삼촌이 나타났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두 개나 탔지만, 이후 안기부 소속의 활동을 한다는 말만 남기고 실종되었다. 어머니께서 실종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그를 찾지 못했고, 정부기관 어느 곳에서도 남아있는 가족에게 그의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남긴 흔적은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찾아와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며, 한동안 소식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가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태어났다.  


외삼촌의 이름은 김성훈이다.

삼촌이란 단어는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던 호칭에 불과했는데, 제주에 내려오니 너무 특별한 단어가 되었다.

<삼촌>은 제주에서 믿을 수 있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호칭이거나, 그렇게 되길 희망하는 마음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제주도 제주지만 제주에 일면식도 없이 내려온 입장이 되고 보니 삼촌 같은 사람이 그리워진다. 너무 가까워지면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타지에서 살 때는 삼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내는 이웃이 있으면 좋다.


아무튼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친척은 성훈 삼촌이 유일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실종된, 그리하여 얼굴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보지도 못한 어른이지만, 그는 나의 생명을 일전 살려준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나타났다.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뭔가 내 신상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훈 삼촌은 꿈에서 아주 화가 난 표정을 하고 나를 꾸짖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표정과 기운으로 당장 일어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만 해도 의사가 진단해 준 그 병 때문에 내 몸에 이상이 온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아내와 인사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구나!’


나는 이런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올 거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을 짓다 보니 정신없이 바빠서 아직 유서는 쓰지 못했다. 생각보다 그 시간이 너무 일찍 찾아온 느낌은 들었지만 저 세상 맞이할 자세를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집을 안전하게 완성하고, 가족을 모두 데려온 뒤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완성한 나만의 것, 창조물은 이 집이 유일하다. 이 집에서 1년만 살게 해 달라 기도했지만 결국 이렇게 첫겨울에 죽게 되는구나, 한탄했다.     


그때였다. 외삼촌이 다짜고짜 모로에게 다가가더니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축 늘어져있던 모로가 힘들게 일어나더니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외삼촌은 그렇게 쓰러진 모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눈짓했다. 그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 벌어진 문제가 화로 때문이란 걸 그때야 알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모두 죽은 시체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발견될 것이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몸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조금 열어 “어! 어!”하고 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아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희망은 내가 누워 있는 바로 옆 창문을 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 몸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당겨 창문을 열었다. 아주 조금밖에 열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효과가 있었다. 팔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창문을 더 활짝 열었다. 그리고 몸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이 생기자 아내를 깨웠다. 하지만 "으응..." 하는 소리만 내며 아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모로에게 기어갔다. 아내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바로 노출되어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모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일어나 복도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영하의 바람이 방안을 휘돌았고, 아내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아내는 뺨을 맞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어나려 하다 쓰러지며 이렇게 말했다.

“어! 나 왜 이러지?”


나는 그녀에게 일어설 수 있겠냐 묻고 겨울 외투를 입혀준 뒤, 마당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로를 안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서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모로 왜 이래? 나 지금 어지럽고 메스꺼워.”


다행히 모로의 전신을 계속 마사지한 뒤 5분 여 흐르자 모로도 깨어났다. 아내가 내 외투를 가져와 입혀줬다.




이런 강력한 접촉을 하고 나면 그 영혼과 더 자주 만나게 되지만 삼촌은 그게 나에게 좋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후로 내게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그의 소임을 다했다고, 마지막 날에 영원히 함께 할 거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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