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오급 생맥주의 추억
친구에서 부부가 된 우리는 종종 이곳저곳을 함께 다닌다. 신혼집이 연남동 근처라서 가벼운 산책처럼 연트럴 파크를 거닐기도 하고, 혹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으면 계획 없이 들어가 허기를 채우기도 한다. 음식에 술이 곁들여지는 경우도 당연히 많다. 우리 둘 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친구 시절에도 함께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부부가 될 것이라 예상 못했지만.)
주말의 어느 날, 각자의 마감을 끝낸 우리 부부는 평소처럼 연남동을 거닐다 새로 발견한 일본식 선술집에 들어갔다.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기에 적당한 분위기인 그곳은, 이미 여러 커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한 바로 옆자리에도 소개팅에 한창인 연인이 그 특유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소개팅 남녀의 대화는 왜 자꾸만 엿듣게 될까.) 들려오는 솔깃한 옆 테이블의 이야기를 털어내기 위해, 테이블에 놓인 그곳의 메뉴판에 의식을 집중했다.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그럴싸한 안주거리를 찾아내 메뉴를 결정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맥주 종류를 훑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국산 생맥주 500cc 두 잔을 주문했다. 그 순간, 아내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데이트 상대처럼 대해줄래?"
"응??"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 생맥주가 원인이었다. 우리가 부부가 아니라, 연인 사이라면 상대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가장 싼 맥주를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내가 주문하려던 생맥주와 가격차가 꽤 나는 고오급 생맥주가 대부분의 연인 테이블에 곱게 올려져 있었다.
'난 애초에 맥주 맛을 크게 구분 못한다'는 어쭙잖은 변명을 꺼내보려 했지만, 이내 그 말이 공중에 흩뿌려지며 그 공백에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내의 말은 합리적이었고, 타당했다. 미혼의 내가 마음에 드는 누군가와 이곳에 왔다면, 과연 지금처럼 행동했을까? 아마도 상대의 의사를 묻거나, 오히려 내가 먼저 나서서 고오급 생맥주를 권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고오오급 생맥주보다 비싼, 고오오오오오오급 위스키나 와인 리스트 같은 것을 뒤적였을 수도 있다.
이후에도 우리는 그날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느 식당이나 술집에 가도, 그 생각을 끄집어내 데이트 상대처럼 아내를 대한다. "우리 가장 비싼 거 먹자! 데이트하는 것처럼!"(뒤끝 작렬인가..) 그러면 오히려 지금의 아내가 "됐어. 돈 아껴야지. 그냥 싼 거 먹어!"라고 웃는다. 이것은 단순히 메뉴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것을 되새기게 해 준, 아내가 그래서 고맙다.
관계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를 만들 수는 있다. 다만, 그 변화가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부부는 그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평생토록 잘 보이고 싶은, 이번 생의 '귀인'이다. 고오오오급 맥주로 격하게 짠을 해도, 충분히 좋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