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n May 11. 2023

불확실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우리.

나와 유코는 호주 유학원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이다. 유코는 일본의 작은 소도시에서 온 친구로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게 되면서 친해졌다. 유코는 나보다 어린 친구였지만 한 번도 나이차이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 몇몇 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알고 지내던 한국인 친구와 함께 셋이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부분의 유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그러하듯 유코도 1년 정도 머무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뒤로 종종 우리는 메시지를 주고 받거나 통화를 했다. 유코는 일본으로 돌아가 작은 회사에 생산직 업무에서 일을 했었다. 살고 있는 도시가 작은 도시이기도 했고 대도시로 나갈 상황이 아니라 본가가 있는 곳에서 지냈다. 같이 일하는 분들이 나이대가 많아 유코는 그곳에서 나이가 제법 어린 직원이었다. 매니저 한 명이 일도 안하고 불성실하다면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그럼 나도 일이 힘들다며 징징 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각자의 힘듦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했다. 다시 호주로 오고 싶다던 유코는 코로나가 터지고 결국은 오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캐나다로 오게 되었고 우리는 예상치 못하게 일본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늘 유코에게 일본에 가면 꼭 널 만나겠다고 말했었다. 유코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우동이 맛있다며 나중에 꼭 초대하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유코의 동네가 아닌 도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코는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도쿄로 와주었다. 만나기로 한 역에서 한참 서로를 찾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마주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얼굴을 마주했던 시간이 고작 몇개월 뿐이었던 친구를 몇 년이 지나고서야 만났는데 우리는 그저 오래된 친구만큼 서로 반가워했다. 일본인인 유코와 내가 대화를 하면서 쓸 수 있는 말은 영어뿐이다. 나의 영어도 부족하고 유코의 영어도 유창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 가기로 한 유명한 거리의 입구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 찍는 걸 어색해하는 나를 데리고 유코는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고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평일이라 거리는 적당한 사람들로 차있었다. 옆으로 늘어선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며 우리는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몇가지 길거리 간식들도 맛을 보았고 유코는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오래전 일본에 왔을 때 절에서 사주를 뽑은 적이 있었다. 일본어를 읽을 수 없어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좋은 운세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것이 부적 같은 느낌이 들어  지갑에 고이 넣어 가지고 다녔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친구와 함께 운세를 뽑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로 좋지 않은 운세가 나와버렸다. 제법 상심이 커지려던 찰나에 유코는 그걸 묶어버리면 된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나쁜 운세들을 묶어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묶인 종이들이 많지 않았고 내가 장난으로 투덜거렸더니 유코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신나게 웃었다. 유코의 운세는 좋은 운세였다. 그래서 나에게 다음에는 꼭 좋은 운세를 다시 뽑으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유코는 나랑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유리 공예 프로그램을 예약해 두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거리를 좀 더 걷고 공방으로 향했다. 여러 가지 유리로 만든 소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가게 한켠에 유리구슬을 만들 수 있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일본인 친구랑 다니니 의사소통도 편하고 이런 로컬 경험도 해보고 즐거웠다. 색색의 유리 막대를 열로 녹여서 구슬을 만드는 워크숍이었는데  완성된 구슬들이 참 예뻤다. 각자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고 유코의 통역을 들으면서 구슬 세 가지를 만들었다. 볼 땐 쉬워 보였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만든 구슬을 엮어 열쇠고리를 만들었다. 이걸 볼 때마다 오늘을 기억할 수 있겠지. 물성이 남기는 선명한 기억은 때론 참 유용하다. 캐나다에선 아직도 열쇠를 쓰기 때문에 매일 들고 다닐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이곳저곳을 걸었다. 가보고 싶었던 빵집도 가보고 쉬지 않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종일을 걸어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저녁까지 이곳저곳을 누비고 저녁을 먹기 위해서 유코가 찾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근데 하필 그날 가게는 점심영업만 한다는 안내문을 내건 채 굳게 닫혀있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유코는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왜인지 가게마다 사람이 제법 많았고 우리는 되돌아 나와 구글맵을 켜야만 했다. 근처에 오코노미야끼를 먹을 수 있는 가게를 발견했고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리로 향했다. 한산해진 시장 거리 초입에 작은 가게 간판이 보였다. 딱 봐도 오래된 작은 가게에는 주인 할아버지 혼자 가게를 지키고 계셨다. 나는 마를 먹지 못해서 유코는 주인 할아버지에게 마가 들어가는지부터 물어보았다. 들어간다는 말에 그럼 몬자야키를 먹어보는 건 어떠냐고 유코가 제안을 해왔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작은 주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척척 재료들을 만들어 가져다주셨다. 작은 테이블 중간에 오래된 그릴이 있었다. 옆에 놓인 양념통과 할아버지의 손글씨로 적힌 메뉴판.

혼자였다면 오지 못했을 이 작은 가게는 40년이 되었다고 했다. 유코 덕분에 나는 이 가게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팀의 팀원이 가게에 왔던 일, 몬자야키가 예전에는 어떤 음식이었는지 등등 할아버지는 유코를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연찮게 들어온 이 작은 가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밖에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들이 우산을 털며 가게로 들어왔다. 우리는 가게에 더 머물러야 했다. 밖은 조용했고 가게를 나섰을 때는 이미 다른 가게들은 다 닫고 조용했다. 일단 우산을 하나 사러 근처 가게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 붕어빵도 먹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빵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산을 쓰고 거리를 돌고 돌아 우리는 역으로 돌아왔다. 유코의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역에서 같이 기다렸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꼭 다시 만나자며 그곳이 유코가 사는 곳이든 내가 사는 곳이든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꼭 보자고 그런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볼 줄 몰랐는데 우리가 만날 수 있지 않았냐고. 유코는 낮에 샀던 고구마 간식을 나에게 주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면서.

이 날 유코는 나에게 그동안 힘들었던 일상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만나 너무나 오랜만에 웃는 거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본 여행을 앞두고 유코와 연락을 주고 받다가 답장이 늦은 유코가 미안하다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유코와 할아버지의 관계가 제법 가깝다는걸 어림잡아 알고 있었다. 그때 난 유코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었다. 마음을 다해서 말을 전하고 싶은데 도대체가 어떠한 언어로 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결국 번역기를 켜서 위로의 말을 적어 내려갔다. 유코는 고맙다며 메시지를 보내주었었다. 유코의 지난한 시간들과 나의 우울했던 시간들은 맞닿아 있었다. 유코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면 혹은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었다면 아니 우리 둘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그 시간들에 더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을까?

숙소로 돌아와 그날 만든 구슬을 열쇠고리에 달았다. 언제고 오늘을 기억해야지. 유코도 이걸 보면서 한 번은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오늘 뽑은 좋은 운세가 꼭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와 위로해주기를.

작가의 이전글 기억하는 것과 마주하는 지금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