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가방 속 쇼핑백을 꺼내며 D선교사님이 말씀하신다. 걷네 받은 쇼핑백 안을 살펴보니 아이들용 비타민 젤리 두 통과 영어 성경 동화 그리고 컬러링북이 들어있다. 코로나로 인해 4년 만에 선교사님 얼굴을 뵌 것만도 감사한데, 한국과는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저 멀리 호주에서부터 선물을 가져오셨단 생각을 하니 왠지 뭉클했다.
호주에서 먹었던 가장 따뜻했던 식사
D선교사님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 호주에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국만리에 홀로 공부하러 갔던 20대의 나는, 진취적인 성향의 꿈 많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큰 포부와는 달리 호주 유학 초기에는 낯설고 외로워서 마음 붙일 곳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선교사님 집에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를 대접받은 날,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딸처럼 대해주시던 따뜻했던 온기와 다정한 분위기가. 막막하게 느껴졌던 유학생활의 현실에서 위로를 받는 느낌이랄까? 찌개와 밑반찬 그리고 샐러드 로 차려진, 특별할 것 없는 한국스타일 집밥이었지만 내가 호주에서 먹었던 식사 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 후로도 종종 선교사님 댁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D선교사님께서는 한국에서 갖 도착해서 어려움을 겪는 청년 유학생이나 워홀러들을 챙기며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시곤 했다. 아마 그 청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으리라.
내 유학생활의 안식처 같은 선교사님 부부. 2년의 길지 않은 유학생활이었지만 지금까지 연락을 유지하며 인연을 이어오게 되었다.
그 후로 10년이 흘렀습니다
학교 졸업 후 조금 더 호주에 머무르려던 애초 계획과는 다르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해외로 나가서 살 수 있을 거란 (지금 돌아보니)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는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특히 결혼 후 아이가 생기니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더라. 호주에서의 유학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독립적일 수 있는 20대 시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가 아니었나 싶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꿈 많던 유학생 처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D선교사님 부부는 섬기던 교회에서 은퇴하셨다. D선교사님의 딸이자 내 친구 C는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해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삶을 나누며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당연하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대륙별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란. 시간의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누군가에게 잠깐의 휴식이 될 수 있다면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신 선교사님의 일정은 빠듯했다. 무리한 스케줄에 혹여 몸살이라도 날까 걱정 섞인 말씀을 드렸더니 아직은 멀쩡하다며 환하게 웃으신다. 다가오는 아이들 픽업시간에 마음이 급해져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직도 나누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는데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잘 쓰임 받도록 기도할게.
이번 만남에서 나에게 하신 선교사님의 마지막 말씀이 가슴에 콕 박힌다. 매년 한국에 오시면 또 다시 뵐 수 있는데, 뒤돌아 나오는길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눈물이 많아지다니 나이가 들었나 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위로가 되며 힘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집에 오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다. 내 성취와 내 꿈만 좇아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시절에 만난 휴식 같은 분. 이제 나도 거창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마음 넉넉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새로운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