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유학생활이 시작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다닐 교회를 찾고 있던 중, 어느 한인교회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그날은 그 교회 목사님과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시드니 시티 차이나 타운 쪽에 아주 유명한 푸드코트가 있다. 시드니에 워킹홀리데이를 오거나 유학을 온 사람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멀고 먼 이국땅에 갓 도착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유학생은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살짝 두렵고 새로웠던 시기다.
자연스레 목사님의 안내로 찾아간 그 푸드코트 한 편의 락사(Laksa) 가게. 이름도 즐거운 'Happy Chef Seafood and Noodles'다. 시드니 시티에 올 때마다 들리는 맛있는 집이라며 자신 있게 말하는 목사님의 권유에 나도 같은 메뉴를 시켰다.(락사에도 토핑에 따라 종류가 많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이 워낙 자주 와서 그런지 영어 메뉴 옆에 한글로 된 설명이 쓰여있다. 왠지 안심이 되는 메뉴 선정. 그런데...
우웩, 이게 뭐야?
락사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마자 육성으로 쏟아낼 뻔한 마음의 소리!
'이 괴상망측하며 낯선 맛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 목사님, 초면에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으신가?' 고작 국물 한번 맛본 그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떠다닌 생각들. 어른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 체면은 차려야겠어서, 표정관리를 하며 점심식사를 했다. 왜 많이 먹지 않느냐는 상대방의 물음엔 속이 좋지 않다는 대답을 하면서.
그 후, 그 목사님이 계시는 한인교회를 섬기게 되었지만 한동안 락사가 주는 충격에서는 벗어나질 못했다. 간간이 연락하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내가 정말 희한한 국수를 먹었어'라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인들에게 호불호가 매우 강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반전을 미리 이야기해 주자면, 락사는 지금 나의 소울푸드가 되었고, 시드니를 떠나오는 그날까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먹는 최애 메뉴가 되었다.
락사(Laksa)는 어떤 음식인가요?
아직은 생소할 수도 있는 메뉴. 나도 호주에 가서 처음 접했다. 글로벌한 메뉴와 맛집들이 우리나라에도 속속 생기고 있지만, 락사는 그중에서도 덜 알려진 편인 듯하다.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강렬한 코코넛과 독특한 페이스트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락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 서울에 그리 많지는 않다.
락사는 생선이나 닭으로 우린 매콤한 국물에 쌀국수를 넣어 만든 말레이시아의 국수 요리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5, 16세기에 페라나칸(Peranakan, 말레이 반도에 이주해 온 중국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탄생한 후손)이 중국식 국수에 현지의 식문화를 접목하여 락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는 대중음식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민자의 나라 호주에는, 호주에서 그나마 가까운 동남아 출신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마치 동남아시아 여행을 간 듯 다양한 미식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락사는 호주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남아 음식이 아닐까 싶다. 락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호주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으며 인기 많은 락사는 'Curry Laksa'로 코코넛과 카레 베이스로 맛을 낸다.
이렇게 장황하게 락사의 사전적 정의까지 설명했으나, 한번 맛보지 않으면 어떤 음식인지 당최 감이 안 오리라.
나의 락사 단골 식당
1) Malay-Chinese Takeaway
1/50-58 Hunter St. 9231 6788
내가 살았던 시티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으로 저녁시간에 셰어하우스에 같이 살던 친구들과 종종 가곤 했다. 회사가 몰려있는 많은 MartinPlace 근처라서 직장인들도 많았다. 'Sydney's Best Laksa'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레스토랑으로 King Prwan Laksa가 일품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새우가 들어간 락사를 선호한다. 항구인 시드니에는 싱싱한 해산물이 많아서 새우의 질도 매우 훌륭했던 기억이다.
검색해보니 1987년 개업한 이후 아직도 성업 중이다. 매우 반갑다. 지금 당장 달려갈 수는 없지만.
*참고로 호주에서는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할 때, 'take out' 이란 말보다는 'take away'란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쓴다. 우리가 take out에 더 익숙한 이유는 미국식 영어에 더 영향을 받은 듯하다.
대학 내 푸드코트. 그 당시 학생이던 나는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그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주로 식판에 그날그날 정해진 메뉴를 담곤 했던 국내 대학의 학식과는 달리, 이곳은 본인이 준비한 도시락(주로 샌드위치나 과일)을 먹거나 교내 푸드코트를 이용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인지라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학 내 푸드코트만 가도 웬만한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마치 이태원의 이국적 레스토랑을 한 군데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맛있다. 당연히 이민자 혹은 이민자에게 전수받은 음식 솜씨로 요리를 하니 그런 듯하다.
사설이 길었다. 한마디로 교내 카페테리아 락사도 맛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와 상호명이 바뀐듯하고. 인테리어도 좀 더 모던해졌다.
UNSW 푸드코트 (출처: UNSW 홈페이지)
호주의 유별난 락사 사랑
호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식에 락사는 꼭 있다.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고유한 전통 음식이 많긴 어렵고 다양한 문화와 음식이 공존하며 호주만의 색을 찾아가는 케이스다. 그래서인지 호주만의 특색이 가득하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기도 한다. (호주 커피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호주에서 스타벅스 찾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를 참고하시길) 그중에서도 락사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호주. 검색창에 'best laksa Sydney'라고 치기만 해도 온갖 락사 맛집 리스트와 관련 기사가 즐비하다.
심지어, 호주 북쪽 Darwin에서는 매년 락사 페스티벌이 열린다. 축제 기간 중에, 가장 맛있는 락사를 뽑는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참고로, 다윈은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가 많아서 그곳 음식이 많이 퍼지고 발달했다고 한다.
다윈 락사 페스티벌 (출처: https://laksafestival.nt.gov.au)
외로운 유학생을 위로해 주던 Comfort Food, 락사
몸이 으슬으슬 하니 감기 기운이 있거나 혹은 심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날. 그런 날엔 여지없이 락사가 생각났다. 타국 만 리로 간 유학생이 엄마표 된장찌개를 먹을 수 없으니 나름의 대안을 찾았었나 보다. 하긴, 식성이 워낙 특이한 나는 된장찌개와 락사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락사를 고르긴 할 거다. 코코넛 국물이 주는 온몸 가득 진한 울림과 우리네 매운맛과는 다른 은은한 스파이스가 숟가락 한 모금을 타고 입안으로 들어올 때면 마치 축제에 온 듯하다. 뭐 이렇게까지 맛 묘사를 극적이게 하느냐고? 나도 이런 재주가 있는지 이제 알았다. 정말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는 온갖 미사여구가 다 나오는구나 싶다. 시드니에 가서 좋은 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를 락사를 포함한 미식의 세계에 눈뜨게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저는 아직도 락사 맛집을 찾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돌아온 후 락사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국내엔 파는 곳이 많지 않았고 있어도 호주에서 먹던 만큼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종종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여행을 가면 꼭 락사부터 맛보았다. 워낙 동남아시아권에서 사랑받고 대중적인 음식이다 보니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그런지 내가 찾는 그 맛이 나질 않았다. 동남아시아 여행만 가면 락사 맛집부터 찾아 헤매는 나를 남편은 신기하게 봤다. 그리고 락사 맛을 보더니 더 신기해했다. (남편은 조금 맛만 보고 안 먹더라...)
나는 어쩌면 호주유학 시절의 기억 속 위로의 맛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에도 락사를 파는 곳이 점점 더 생기고 있다는 것은 진정 반가운 일이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다시 락사 맛집 탐방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