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45분,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찬 물을 한잔 마시며 커피도 내렸다. 나주역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하는 KTX를 타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전날 챙겨둔 수영 가방을 다시 한번 들춰보며 빠트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차에 시동을 거니 5시,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수영 대회에 앞서 다이빙을 배우고 싶었다. 다이빙해서 출발하는 게 속도 경쟁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강습 중에 강사님을 졸라 배워볼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 강사님이 하라는 것도 잘 못하는데 새로운 걸 요구한다고 할까 봐 말도 못 꺼냈다.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돈을 더 쓰는 게 나았다. 그래서 홀로 사비를 내서 과외를 받으려고 한 것이다. 다만 내가 사는 곳에선 그런 클래스가 열리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서울에서 열리는 한 클래스에 신청했다. 4시 45분 기상, 5시 출발.... 이렇게 숫자만 봤을 땐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새벽안개를 헤치며 고속도로를 달리자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제시간에 맞춰서 기차에 타고나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잠깐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 나 역시 수강 신청을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열정 넘치는 여정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원래는 강습받기로 한 다음날까지 서울에 머물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간 김에 수업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일정 중 머물 예정이었던 친정집에서 일정이 틀어지며 힘든 상황이 됐다. 그쯤 되면 클래스를 예약 취소할 수도 있었지만 대회 전에 다이빙을 꼭 배우고 싶기도 했고, 이미 수업 개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 취소하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았다. 이처럼 결단은 이미 내렸고, 주사위는 던져졌지만 기차 안에서 3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도 계속 되물었다.
'수영을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이렇게 무리한 열정이 꼭 필요했던 걸까?'
그날만큼은 '무리'와 '열정'이 같은 뜻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수영 강습은 아주 알차고 재미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처음엔 강사님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지만 몸을 움직이니 점차 정신도 다시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12시에 시작되는 이 수업을 듣기 위해서 새벽 5시부터 달려왔다는 내 말을 듣고 강사님은 더욱 열정을 불태웠다. 물 안팎에서 자세를 봐주고, 꼭 배우고 싶었던 다이빙 외에도 각종 영법의 자세들을 교정해 주었다.
당초 예정되어 있었던 40분을 조금 넘겨서 강습이 끝나자 얼른 샤워를 끝내고 다시 기차역으로 갔다. 다시 5시간 가량을 지하철과 기차, 자동차를 옮겨 가야했다. 집에 도착하니 깜깜한 저녁이 되어있었다. 대충 짐 정리를 하고 배운 것들을 메모장에 급히 적어두고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이렇게나 힘들게 배웠으니 다이빙 같은 수업 내용이 수영 대회에서 도움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대회에선 배운 대로 다이빙을 하지 않고 일명 '물속 출발'을 했다. 아마추어 수영 대회의 포인트는 스타트 후 물속에서 15m정도 나아가는 잠영을 얼마나 저항없이 잘 해내는가, 그리고 25m 도착 후 턴을 할 때 속도가 얼마나 잘 유지되는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배운 지 얼마 안 된 다이빙은 성공 빈도가 낮았다. 수면에 온몸이 부딪히는 일명 배치기를 하거나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입수에 실패하면 이후 경기 운영에 부담이 커진다. 자칫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전 대회에선 평소 하던 대로 출발과 턴을 했다. 그리고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동호인들의 축제답게 서로 응원하는 분위기여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날은 일등에겐 엄지를 치켜세우고 꼴등에겐 박수를 보내는 날이었다.
'걱정은 수용성'이라는 수영인들의 농담처럼 대회 전날까지 걱정되었던 마음은 풀장 물에 스르르 녹았다. 참가비도 없고 상금도 없는 그 대회에서 나는 경품 추첨으로 16봉짜리 김 세트를 받았다. 그리고 각 수영장의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새벽반' 언니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대회를 계기삼아 유학까지 다녀오고 나니 수영을 위해 열정적으로 보냈던 지난 몇 주간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물론 돈과 시간을 썼으니 최대한 좋게 해석하려는 마음이 포함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손에 쥔 깨달음을 남겨두고 싶다.
우선 새로운 세상을 확인했다. 수영은 유독 나이 든 사람들도 취미로 즐기는 경우가 많다. 물 위에 떠 있고 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니니 움직이는 게 수월해선 것 같다. 체력적으로 만만한 운동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회에 참여한 선수들 중에는 5,60대도 많았는데 대부분 나보다 기록이 좋았다. 성실하게 근력을 쌓아갈 수 있는 운동이란 확신이 들었다. 경기장에서 봤던 엄마 세대, 할머니 세대의 언니들처럼 활기차게 나이 들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겼다.
경험은 무조건 쌓을수록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빙을 배우고 난 뒤 강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이제 많이 연습하면 돼요. 잘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연습해서 익숙한 사람과 서툰 사람이 있는 거거든요."
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안 해봤던 대시(빠르게 나아가는 것)도 해보고, 초를 재가며 물살을 갈랐다. 그 과정에서 물을 당기는 노하우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좀 더 적용하려고 했는데 이런 경험이 자세 교정 위주의 강습 시간에도 도움이 됐다. 수력 1년 차에 여러 경험들, 그러니까 동호인 대회에서 꼴찌도 해보고, 스타트와 턴도 잘 못하는 여러 경험들을 해보았으니 다음번엔 좀 더 나은 수영 폼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수영뿐만 아니라 뭔가 도전했던 기억,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해 했던 노력과 협동했던 기억들도 값진 경험이었다. 이런 기억들이 여러 상황에서의 나를 더 의연하게 만들 거라고 확신했다.
마지막으로는 앞선 결심과 좀 다른 결인데, 내가 경쟁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또 확인했다. 수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수영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기록을 단축해야 한다는 생각과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사실 프로 선수도 아닌데 행복한 수영을 할 수 없다면 대회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나중에 또 다른 대회 공고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회가 끝난 지금으로선 당분간 그 어떤 경쟁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실제로 대회 후에는 무리한 운동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선지 온몸에 근육통이 와서 다음날 운동을 쉬었다. 당분간은 강습 때에만 성실하게 참여하면서 다시 행복하게 물속을 오가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대회 날엔 오후 내내 수영장에 머물러야 했기에 남편이 아이들을 전부 돌봤다. 덕분에 풀장에서 돌아온 뒤에는 인생의 유학을 한 단계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처럼 기분 좋게,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회 전날에도 남편이 배려해 줘서 온전히 컨디션 관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직접 응원하러 오지는 못했지만 이처럼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해 준 게 너무 고마웠다.
저녁에 맛있는 식사를 차려내고는 다음 주 주말에 내가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당신은 좀 쉬라고 했다. 환한 얼굴로 "예~!"하고 왼쪽 팔을 쭉 펴며 웃는 그가 귀엽기도 하고 조금 애잔하기도 했다. 대회장에 가기 전 나를 꼭 안아주었던 아이들의 상큼한 냄새와 남편의 따뜻한 지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 둘과 지지고 볶는 일, 배우자와 서로 기대며 부부로 커가는 일,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수영이 함께 엮여 매번 새로운 교훈을 준다. 시골이라는 평온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일상을 천천히 소화시키면서 오늘 배운 것은 뭔지 생각해 본다. 불과 1,2년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세상들이다.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 게 마침 시골에 이사 온 즈음과 겹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난 시간이 마치 '열정의 유학길' 그 자체인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수영하고 아이 돌보는 그 모든 생활에 지쳐 '이게 맞나? 이렇게까지 열정을 불태울 일인가?' 되묻기도 하지만 결국은 묵묵히 하는 걸 택한다. 그러면 얻는 게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미래가 막연히 불안할 땐 일상을 성실히 해나가며 호흡을 다듬는 것이 좋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논밭과 풀장 사이를 헤엄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어제보단 좀 더 나은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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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논밭과 풀장 사이, 나는 헤엄친다>가 30회 최대 연재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 목요일(10/23)은 쉬면서 재정비를 하고, 다음 주부터 새로운 브런치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 작가 미지의세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