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지난 연휴,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엔 거의 영화광처럼 살았다. 하루에 영화를 한두 편씩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러기 위해서 집안일이나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오직 식사만 겨우 챙겨 먹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본 영화들은 코믹, 스릴러 등 장르가 다양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도 있었다. 바로 박정민이었다. 음, 사실 앞 문장을 좀 더 정확히 말하려면 이렇게 고쳐야 한다. 쉬는 날 박정민이 나오는 영화를 쭉 몰아봤다. 배우 덕질을 하느라 연휴 자유시간을 거의 다 보냈다!
덕질은 '좋아하는 분야나 대상과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이다. 대상이 될 만한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늘 사람만 파고들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애인이나 존경할 만한 선배들처럼 실제 일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덕질해 왔다. 시작은 늘 같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본다. 취향과 취미 같은 건 외우다시피 한다. 이렇게 알게 된 사실을 나의 세계와 비교한다. 간극에 대해 탐구하면서 상대와 주기적인 교류를 한다.
덕질의 대상이 손을 뻗으면 닿고, 직접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점은 몰입도를 높였다. 그 어떤 것보다 자극적이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특히 전 연인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고 하면 좀 과하긴 하지만, (그리고 배우자 눈치도 좀 보이지만) 옛날 애인과의 시행착오 덕분에 현재 배우자에게는 좀 더 나은 방식의 사랑을 줄 수 있게 됐다. 또 존경하는 선배들은 어떤가. 그분들의 의사소통 방식이나 협업의 방법,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업무 후 음주 문화(!) 등을 흡수하면서 나름대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갔다. 이처럼 주변에 배울 점이 많다 보니 연예인이나 기타 창작물 등에선 감흥을 별로 못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육아 휴직을 하며 자연스럽게 주변 덕질의 계보가 끊겼다. 휴직 중 하루 종일 함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는데 가족을 덕질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꽤 활력이 되는 일이기에 새로운 상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좀 더 멀리까지 보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 너머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시절은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 거의 24시간 비상근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새벽 3~4시 사이의 고요한 시간, 언제든 유튜브만 켜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봤다. 그러다 얼굴만 겨우 알고 있었던 어떤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로서의 생활은 잠시 쉬고 이전에 만들었던 출판사 운영을 해볼 거라고 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출판사를 어엿하게 세워두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소리 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스피커가 되어주고 싶다'는 포부. 그의 신념이 묻어나는 말들을 들으면서 관심이 커졌다. 시각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일명 '듣는 소설' 시리즈에 대한 인터뷰를 독파하면서는 전율이 올랐다. 나는 유독 자신보단 사회와 타인,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약하다.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신념이 얼마나 많은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지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또 스스로가 되고 싶은 모습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기에 먼저 꿈을 이룬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문다. 그래서 그 뒤로 박정민의 모든 행보를 눈여겨봤다. 그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구매하고 주변에 선물했다. 굿즈들도 물론 샀다. 그의 신작 영화는 개봉 날 영화관에 가서 봤다. 12월엔 그가 할 뮤지컬도 예약해 뒀다. 이쯤 되니 상대가 진짜 아는 지인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제는 친한 친구를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배우의 모든 행보에 일단 박수를 치고 본다.
연예인을 덕질하는 건 자칫 비아냥을 듣기 쉬운 일이다. 철없다는 판단을 듣기 쉽고, 화면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상대를 순진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연예인과 팬의 관계는 상품과 구매자 정도의 관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이들도 있다. 박정민의 팬이 되었다고 했을 때 내가 실제로 들은 평가들이다.
그런데 그건 덕질을 제대로 안 해본 사람들의 섣부른 판단이다. 아니, 일단 멋지고 화려한 사람들을 겉모습 때문에 좋아하면 안 되는가? 멋진 예술품, 보기 좋은 사람들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인데 말이다. 또 그가 보여주는 모습만 보고 좋아하면 왜 안 되는 거지? 오히려 덕질의 대상이 주기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을 곰곰이 되짚다 보면 내가 어떤 점들에 끌려하는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본업에 열심히 하는 태도,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 등 내 '최애'를 좋아하는 포인트가 곧 내 이상형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게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과업인데! 연예인을 향한 과도한 사랑과 집착만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과한 몰입은 꼭 연예인이 아니어도, 어느 누구에게 하든지 좋지 않은 것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그가 알아챌 정도로 엄청나게 열렬한 팬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특정 배우를 응원하는 새로운 덕질을 하는 중이다. 그가 부른 <고민중독>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밥을 먹을 땐 이전에 그가 출연했던 유튜브 영상을 다시 틀어놓는다.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고 변하겠지만 지금 덕질을 하며 쌓은 행복은 진짜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 최애가 했던 말과 행동들의 멋진 점을 곱씹으며,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동력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