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사람도 모르는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얼마 전, 얼굴이 달아오를 만한 일이 있었다. 동네 도서관 노트북 이용실에서 신나게 글을 쓰고 있는데 문득 A4용지 뭉텅이가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탁탁,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옮기니 짜증이 섞인 듯 날려 쓴 문장이 보였다.
‘키보드 소리 좀 자제해 주세요! 노트북 이용실 수칙입니다!!’
얼굴이 빠르게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앞을 쳐다보니 한 여성이 자신의 일의 열중하는 척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뭔가에 집중하는 듯 보였지만 표정에서 채 다 가시지 않은 화를 느낄 수 있었다. 재빨리 손에 힘을 빼고 조심히 키보드를 마저 두드렸지만 문득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성질내면서 말할 일인가? 사람 무안하게!’ 한참 마음을 다스렸지만 쪽지를 건넨 앞 사람도 신경 쓰이고, 그 상태에서 계속 키보드를 누를 기분도 아니어서 결국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한 손에는 노트북, 다른 손에는 가방을 무겁게 든 채로 문 밖의 이용 수칙을 읽었다. 키보드 소리에 관한 내용이 없다면 마음으로나마 그녀에게 무섭게 화를 내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예민하게 군건지, 고작 그 예민함 때문에 누군가가 어떤 무안함을 느껴야 했는지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나도 다가가 볼펜으로 책상을 두드려볼까. 탁탁.
하지만 나의 복수는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났다. 이용 수칙에는 정말 ‘노트북 키보드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기운이 빠졌다. 불과 30분 전까지 그 공간에서 내가 가장 무례한 사람이었다니. 그제야 꽤 오랜 시간동안 내 타자소리에 괴로워하며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주 조금 헤아려졌다. 미안한 마음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살짝 쳐다보았고, 발걸음을 조심하며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준 사람도 모르는 상처들이 분명히 있다. 보통은 ‘상처 발신인’이 발신 내역을 모른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수신인’이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거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니,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누가 채 다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그런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냥 덮고 지나간 줄 알았는데, 한참 뒤에 다시 돌이켜보니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었다. 어느 오후, TV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내용의 강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용이 좋아 계속 귀가 열렸다. 강연자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어랏! 강연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 ‘발신자 없는 상처’를 줬던 사람, 분명 그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머릿속에서 내용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 단상 앞에 서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있었다. 발표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정리된 건 없고... 어찌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그 상태로 앞에 나섰다. 당연히 발표는 한없이 길어지며 엉망진창이 되었고, 마무리라도 잘 지어보자 싶어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결국 교수님이 내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게 왜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 말, “(한숨 후 5초 정적) 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다시 생각해 봐. 다음.”
단상에서 내려와 자리로 가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나는 순간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권고를 받을 만큼 엉망인 발표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피드백도 없이 차가운 한숨을 내쉰 모습, 침묵에 이어서 진행된 ‘엉망’이라는 표현의 변주곡들을 듣고 있자니 내 안의 뭔가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자존심 따위의 것이었겠지. 어쨌든 당시 교수님의 눈빛, 태도, 한숨이 뜨거운 낙인처럼 마음에 새겨졌다. 결국 그 수업은 어정쩡한 B 학점을 받으며 대충, 급하게 마무리됐다. 나는 그 교수님을 다시는 볼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교수님께 애써 웃어보였고, 상처는 혼자 묻어뒀다.
그러니까 TV에 나와서 자기 마음을 돌보라는 이야기를, 사람 좋은 표정으로 하는 교수를 보면서 씁쓸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 교수에게 새삼 사과를 받을 수도, 당시 실수를 만회할 기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스스로의 상처를 결국 들추고 말았다. ‘아, 아직도 나는 몇 년 전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가끔씩 건드려보고 하면서 확인하고 있구나.’ 팩트 체크를 하듯,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으며 감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괜찮지가 않았다.
‘버리자’.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그냥 버리자. 그게 한참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이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글이 구원의 밧줄이 되어줬다. ‘무심한 누군가가 상처를 줬다면, 쓰레기를 쥐어줬다고 생각하고 빨리 버려라. 그걸 쥐고 울고 있어봤자, 계속 손 안에는 쓰레기가 있을 뿐이다.’ 그냥 지나가는 인터넷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도 쓰레기로 남겨진 무례함을 치우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예전 상처가 나를 괴롭히려 할 때마다 나는 ‘청소’하는 행위를 떠올리며 ‘극복’이라는 연고를 발라댔다. 처음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이런 행위를 통해 조금씩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어느 래퍼는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 어디 없나’ 찾아나서지만, 그의 노래 제목이 ‘외톨이’인 것을 보면 타인에 의한 치유는 한계가 있는 듯 하다. 일단 치유해 줄 사람의 감정이나 컨디션이 좋아야 하고, 내 상처가 무엇인지를 그에게 명확히 설명해야 하며, 그가 치유될 만한 적절한 말을 골라 내게 건네야 한다. 복잡하고, 위험하다. 어쩌면 나를 치유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들이 더 큰 상처를 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병은 몰라도, 상처받은 데는 자가 치유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이 일은 나를 괴롭힐 수 없다’하고 말해줄 수 있는 건 결국, 나 스스로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