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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Dec 19. 2021

눈이 온다. 겨울이 오고 있다.

지난하고 피곤한 어른의 겨울

 눈이 내릴 때 좋아하면 아이, 싫어하면 어른이라는 오랜 농담을 안다. '눈 내리는 게 싫은 거 보니 나 어른 됐나봐-' 하며 너스레 떤 지도 몇 년 됐다. ‘눈 내릴 때 반응’이 언제부터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는 근거로 작용해왔을까. 아마도 집이 아닌 곳에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부터 일 것 같다. 사실 어른이라고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송이가 싫을 리는 없다.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작은 가루들은 마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터트리는 꽃가루 같다. 소복하게 쌓인 눈은 따뜻하고 깨끗하(게 보인)다. 추위로 얼었던 마음이 절로 풀어진다. 싫을 이유가 없다.


 다만 어른은, 눈이 온 다음날까지 그 여파를 책임져야 한다. 차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고 길이 얼었는지 확인한 다음, 평소보다 출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재봐야 한다. 늦어질 것 같으면 상사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결국 차를 못 타게 되면 좀 더 서둘러서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타야하고 그럼 또... 아무튼 지난하고 피곤한 과정이 추가된다. 한마디로, 좋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첫 출근 날이 생각난다. 회사는 우리 집에서 차로 3,40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첫 출근하던 날은 마침 눈이 오기로 예정돼있어서 위에 서술한 그 번거로운 과정을 포함해 여러 출근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늦은 저녁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이 습도, 온도대로라면 쌓이는 눈, 길에 얼어붙을 눈이었다.


 바로 출근을 위한 최상의 계획을 짰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났고, 미리 챙겨둔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6시 30분 즈음에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가방 안에는 출근길에 읽을 e북도 있었다. 이토록 완벽한 출근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 대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그날 도로는 버스도 기어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결국 회사에는 출근 완료해야 할 시간을 조금 넘긴, 9시 10분 즈음 도착하게 됐다.


 비록 3시간 가량 걸려 출근을 하고도 지각했지만, 그래도 선방했다고 생각하면서 회사 앞마당을 지나고 있는데 익숙한 실루엣들이 보였다. 같은 팀원 동료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을 치우는 동료들이었다! 넉가래를 일렬로 모아 헛 둘 헛 둘. 빗자루를 들고 슥삭슥삭.


 알고 보니 내가 다닐 이 회사는 눈이 오면, 온 직원들이 회사 주변 눈을 치우는 전통(?)이 있었다. 큰 길은 제설차가 다녀가지만 특수 상영관 계단이나, 매표소 앞 근처는 모두 직원들이 눈을 치워야 했다. 동료들이 눈을 치우는 것은 상상도 못 했으므로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가방을 맨 상태로 눈을 치우는 무리에 얼른 합류했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몇 시에 출근하셨어요? 7시요. 옆에 다른 동료가 말했다. 전 7시 30분요. 여기는 원래 광주에서도 눈이 많이 오는 편이어서, 다들 그냥 일찍 와요. “....”


새 출발과 함께 한 첫 눈은 어떤 깨우침을 줬다. 이를테면 어른이 되는 길은 이렇게나 멀고 험하다는 이야기. 아무리 작전을 짜봐야, 나는 그냥 인간일 뿐이라는 이야기. 자연 현상에 맞춰서 더 일찍 일어나거나, 아예 자질 말거나, 지각을 하거나 아무튼 노력해봤자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겨울, 첫 눈이 내렸다. 옆에 있던 동료에게 말했다. 주임님, 지금 눈 온대요. 겨울이 오나봐요. 동료가 답했다. 그러네요. 주임님. 근데 왕좌의 게임 아세요? 거기 ‘Winter is coming'이라는 말이 있는데 .... 나는 창밖을 본다. 왕좌의 게임은 모르지만 그 대사는 알죠. 겨울이 오고 있네요. 지난하고 피곤한, 어른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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