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둔촌 백일장 입상작 (2021. 10. )
명절을 앞둔 주말이었다. 연휴 기간엔 일도 하고, 시댁도 들러야 해서 조금 일찍 친정집에 들렀다. 여유롭게 잘 지내다가 집에 가려는데 짐 가방 위로 엄마의 쪽지가 보였다. 놓고 가는 것 없이 잘 챙기라는 내용이었다. 분명 빠트린 게 없었지만 그 쪽지 덕분에 따뜻한 마음까지 덤으로 담은 기분이 됐다. 그런데 종이 말미에 적힌 세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고마워
인사치레로도 흔히 하는 말이지만 마음에 걸렸다. 엄마는 최근에 유독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딸이 집에 들르고, 전화를 하고, 또 같이 어디를 놀러 갈 때도 고맙다고 끝을 맺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런 표현을 남발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좋을 때만 좋다고, 진짜 고마울 때 고맙다고 했다. 오죽하면 내가 어렸을 적에 적은 용돈과 큰 마음으로 준비한 효도 이벤트를 시큰둥하게 바라봐 딸을 서운하게 한 적도 있다. 그 이벤트가 내 할 일을 하나도 안 하고 면피성으로 준비한 거여서 더 그랬겠지만, 아무튼 이렇게나 솔직한 태도 자체도 엄마로 받아들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뭔가 변한 것이다.
‘왜 자꾸 고맙다고 해?’하고 물어보니 ‘그냥 고마우니까’ 하는, 싱거운 답변만 돌아왔다. 엄마와 최근에 나눈 대화를 짚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신혼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 올라 멍하니 엄마의 말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요즘 결혼 생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남편과 툭탁대고 하소연하면 엄마는 조언을 해주고, 반대로 엄마가 아빠 얘기를 하면 내가 들어주기도 했다. 아, 그리고 가족 이야기도 자주 했었다. 이번엔 할머니 댁에 들렀냐는 이야기.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가족, 특히 여성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쩌면 엄마의 버릇은 나의 상태 변화 때문에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결혼한 딸이 엄마와 시간 보내는 것을 고맙게 여기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는, 아니 여성들은 어쩌면 결혼하고 나서 서로의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애틋해졌던 건 아닐지. 새삼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딸과 며느리와 손녀에게 입버릇처럼 고맙다고 했던 순간들이 스친다.
엄마의 시간에 맞춰 생활하던 딸은 어느덧 다 커서, 자신만의 일상을 산다. 주기적으로 교류하지 않으면 메워지기 어려운 간극이 생긴다. 엄마와 맞물려있던 딸의 시간은 더 많은 것들과 맞물려 돌아간다. 엄마와의 접촉면은 줄어든다. 그걸 엄마도 아니까 자꾸 고마워지는 건 아닐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사실 엄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그런 이유 같은 게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자주 고맙다고 했다. 엄마의 일기장에, 편지들에 그 증거가 남아있다. 건강하게 자라줘서, 씩씩해서, 의젓해서, 심지어 그냥 엄마 딸이라서 엄마는 자식이 고마웠다. 그러니 새삼 결혼이니 뭐니, 그런 이유로 딸을 더 고맙게 여길 리는 없는 것이다.
변한 건 나다. 당연하게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흐르는 엄마 마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괜히 눈이 시큰해지려고 해서 얼른 싱거운 생각을 한다. 그래, 고맙다는 게 인사치레로도 하는 말인데 더 자주 하면 어때.
신혼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생각을 많이 해선지 엄마의 입버릇이 내게 옮았다.
응, 엄마. 거의 다 왔어.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사랑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