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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Sep 14. 2021

선한 어른과의 처음이 쌓여서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요즘 평생 만난 아동 수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다. 과학관이라는, 교육의 현장으로 이직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특히 많은 관람객들이 온다. 그중에서도 출근 후 첫 주말이 기억난다. 기쁘면 그대로 방방 뛰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는 존재를 거의 처음 봤다.


뛰면 안 돼요. 소리 지르면 안 돼요. 안 돼. 안 돼. 안 돼! 하다가 결국 악몽에서 깨어나듯 퇴근했다. 어리고 밝은 에너지를 감당하는 데에는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아니, 다들 어떻게 이런 에너지를 감당하고 사는 거야? 남편에 따르면 나는, 그를 붙잡고 한참 하소연하다가 문득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냥 그렇게 까무룩 잠든 것이다.


그러나, 피곤한 건 나의 사정일 뿐이고, 어린이들은 우리 직장을 찾는 주요 손님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즈음 나온 신간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김소영 작가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였다.

 

책은 애초에 어린이를 ‘작은 인간’으로 상정한다. 다 알고 있지만 그저 조금 서툴 뿐이라는 시선이다. 일단 ‘어느 쪽이 오른쪽 신발일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는 문장으로, 못났던 어린 시절을 강제로 소환한다. 효과는 확실하다. 그래, 나도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 하는, 조금 열린 심정으로 어린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된다. 내가 그토록 질려하고 힘들었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사실, 내 모습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배움의 기회가 소중하다는 것을 자주 이야기한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 애를 먹어 온 것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코를 훌쩍이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니고 싶을 리 없었을 테니, 배움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으리라는 이야기였다.’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사실 ‘몰라서’라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다. 그건 곧, ‘알려주면 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

 

위의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루는 자기 마음대로 전시물을 망가뜨리고 있는 어린이 관람객에게 다가간 적이 있다. 올바른 관람법과 짧은 과학 지식도 안내해줬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그는 이후에 정확한 방식으로 전시물을 관람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린이가 엉망으로 놀려고 할 때 의젓하게 제재까지 했던 것이다. 어린이를 ‘인간’으로 대할 때 철부지가 얼마나 의젓해질 수 있는지, 그가 얼마나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른 인간과 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말해준 거다.


 그 뒤로 나는 어린이들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안 돼’라는 말 대신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천천히 걸어달라고, 주변 다른 어린이에게 양보해 달라고, 조금만 조용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부탁은 대체로 거절당한 적이 없다.

 

‘만일 어린이가 보는 방식으로 보고 싶다면 내가 작아지는 것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커진다고 상상하는 쪽이 낫다.’는 문장을 다시 꺼낸다. 몸집이 커 본 경험이 없는, 그래서 미숙하고 모든 게 어렵기만 한 어떤 인간을 왜 어른의 잣대로만 판단했을까. 내 앞에 있는 작은 인간의 '인생 첫 경험'이 나와의 기억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마음이 새로워진다. 좀 더 착하고 너그러운 어른, 세상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나도 선한 어른들과의 처음이 쌓여 지금으로 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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