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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Oct 11. 2022

내 배는 공공재가 아니지만

예민한 개인주의자를 바꾼 찰나의 친절

 임신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하나. 타인도 내 몸에 거침없이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일 심한 건 직접적인 손길이다. 낯선 손이 아무 거리낌도 없이 바로 내 몸, 정확히는 배에 뻗어온다. 시작은 꽤 친한 친구의 손길이었다. 그는 “배가 이제 임신 티 나네~?”하면서 스윽 내 배를 만졌다. 낯선 손이 닿는 감촉이 싫고 놀라서 그만 화악 뿌리치며 정색하고 말았다. 그래도 친하니까 금세 멋쩍게 웃을 순 있었다. 놀랐잖아, 말 한마디를 붙이며.


 문제는 그 이후에 시도 때도 없이 손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루는 눈인사만 하던 동료가 아무 말 없이, 무려 양손을, 나란히 내 배에 가져다 댔다. 그는 이미 자녀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더 남다른 감정으로 내 둥근 배를 봤을 거라 생각한다. 축복해요,라고 덧붙인 말이 그의 호의를 대변했다. 그래서 나도 고맙다고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울고 싶었다. ‘임산부 배는 공공재라더니, 내 배도 공공재인가.’



 만약 내가 임신하지 않은 상태라면 누군가 내 배를 허락도 없이 덥석 만지거나 이야기 소재로 삼지 않을 텐데. 그냥 배가 튀어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왜 내 배는 모두가 만져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됐나. 그리고 나만 보면 왜 다들 임신 기간과 출산 예정일만 물어보나. 임산부는 나를 소개하는 여러 키워드 중 하나일 뿐인데 왜 나는 오직 임산부로만 존재하게 됐나!



 매일 만난 사이가 아니라면 대부분 시험 성적, 결혼, 취업 등등 보통 생물학적인 나이에 거쳐 가는 주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산부에게는 그게 임신과 출산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에다,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는 습관, 약간의 호르몬 작용이 합쳐지자 잔뜩 예민해졌다. 나를 곤두서게 하는 행동들이 모두 호의에서 비롯됐다는 건 또 다른 고통이었다. 평소라면 내 몸에 손대는 것도 대놓고 싫어하지만 임산부 배는 또 달랐다. 그러니 화도 못 내고 그냥 웃을 수밖에. 스스로 예민해졌을 때 타인을 보호하려면 접촉을 최소화해야 한다. 출산 휴가에 들어가자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 모든 접촉을 끊다시피 했다.



내 배를 자기 배처럼 생각해주는 사람들


 내내 까칠하게 굴었지만, 얼마 뒤에는 낯선 타인이 내 신체를 자기 것처럼 여겨주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출산이 가까워지면서 친정이 있는 서울로 왔다. 자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이젠 조금만 걸어도 배가 무겁고 숨이 차서 어느 칸에 타든 ‘앉아서 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해졌다. 친정 엄마와 어딘가 다녀오는 길에는 다행히 분홍색 임산부 석이 비어있었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득 건너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게 무슨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저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니, 자리가 많은데 왜 하필 거기 앉아요?”


‘난 누가 봐도 임산부인데...’ 스스로를 돌아보니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가방을 무릎에 세워둬서 남산만 한 배가 조금 가려져 있었다. “저도 임산부예요.” 몸을 돌려 가방에 단 분홍 배지를 보였다. 그제야 “아, 몰랐네!” 하며 당혹감을 감추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 것이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임신하지 않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았다면, 내게 말 건넨 분이 역시 “왜 거기 앉아요?” 하면서 막아줬을 것이다. 그러면 나 같은 임산부가 다음 역에서 조금은 마음 편하게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임산부석은 비어있지 않는 한 당사자에게도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자리다. 모두가 피곤한데 굳이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서 거기 앉는 일이 유쾌할리 없다. 앉는 사람이야 ‘임산부가 오면 비켜줘야지’ 생각하겠지만, 임산부들이 굳이 그 사람 앞에 서있거나 하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다른 자리에 있자니 이 역시 불편하다. 임산부석을 비워둔 채 다른 자리에 앉아 가다 보면 ‘저 자리로 내가 옮겨가야 한 분이라도 더 앉으려나’ 이런 생각이 든다. 교통 약자석이 있다고. 그곳은 이미 노약자 승객들로 만석인 경우가 많다. 하여튼 임산부석은 임산부에게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니 이 모든 불편함을 대신해 준 사람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임산부석에 앉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거나, 다리가 아파도 그 자릴 비운채 가는 사람들처럼.


 버스에서 대신 하차벨 눌러준 사람,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라며 양보해준 사람- 내 배를 자기 배처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배려받다 보면 공공재니 뭐니, 이런 투덜거림은 잠잠해진다. 그리고 출산 후 배가 들어갔을 때에도 다른 누군가를 배려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예민한 개인주의자는 찰나의 친절 덕분에 이타적으로 살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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