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하신가영 Mar 23. 2024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엄마, 그래도 가끔 보고 싶으면 이렇게 울어도 되지?

난 속에서 힘들게 버텨온 여자

남편과 아들 때문에 속 썩이며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의 실핏줄이 자주 터지던 여자

공장에서 번 돈으로 애 셋을 키우느라 정말 하루하루가 고단했을 여자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고 했다. 

그것도 수술이 불가한 4기라고 했다.

그렇게 작고 가녀린 엄마의 길고 긴 항암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항암기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의 기록이다.






추석연휴였다. 전화목소리가 좋지 않았지만 괜찮다던 엄마,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항암 부작용으로 얼굴부터 발까지 온몸은 퉁퉁 부어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당시 엄마는 면역항암제로 임상을 하고 있던 중이어서 담당간호사에게 연락을 했더니, 빨리 응급실로 오라고 하셨고, 그렇게 급히 간 응급실에서 받은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병실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밤 새 머물렀던 응급실부터 입원한 암병동까지 병원에서 스친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나 또한 엄마가 아파하는 모습과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로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엄마가 입원한 암 병동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는데, 

엄마 바로 옆 침대에는 엄마보다는 젊은 아주머니가 입원해 계셨다.

오랜 항암으로 머리카락도 다 빠져 비니 모자를 쓰고 있었고, 까맣고 깡마른 아주머니였다.


그 분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당시 코로나가 발병하기 전이라 가족이나 지인 분들이 자주 병문안을 왔던 시기였기에 

그분의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대학생 또래의 아들과 딸이 있는 그 아주머니는 암이 재발된 상태였고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해서 퇴원여부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날도 그분의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의도치 않게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그 순간이 인생의 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던 그 아주머니에게 지인들은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어떡하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주머니는 오히려 지인들에게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암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아이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서 여행도 더 열심히 다니고,
사진도 정말 많이 찍었어. 
많이 행복했고, 우리 아이들도 그 순간들을 기억해 줄 테니 괜찮아.




죽음의 앞에서도, 아픈 병 앞에서 자신의 순간순간을 불행으로 허비하지 않고

행복한 기억들로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마음 한편이 먹먹해졌다.



나는 죽음 앞에서 그런 담대한 말들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작은 불행 앞에서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당시 긍정심리학을 공부하고, 또 강의하는 강사면서도..

불행을 긍정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정작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암 진단은 나의 일상을 무너뜨리게 했고, 

몇 달을 눈물과 우울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나 또한 엄마를 잃게 될까 무서워 매일 밤 울었다.


그런 나를 일으켜준 것은 유명한 책도 아니었고, 심리 이론도 아니었고, 어떤 전문가도 아닌

그 아주머니가 했던 그 말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 그 시간을 소중히 가꿔야 하는 거라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거라고,

그것이 죽음 앞에서도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일 거라고,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눈물과 슬픔만으로 엄마와 함께할 수 없었다.


맛집을 가서 엄마와 맛있는 것을 먹고,

같이 여행을 가고, 

진주와 서울이라는 멀고 먼 거리가 엄마와의 데이트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엄마가 항암을 해서 이렇게 자주 본다며 이러라고 암에 걸린 거 아니냐며 농담하면서 웃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 손은 자주 잡을 수 있었고,

다 커버린 시집간 딸이 엄마 볼에 뽀뽀를 하게 되었고,

나의 일상이 가득했던 휴대폰 사진첩에 엄마의 모습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와 간 남산타워, 엄마와 간 서울숲, 엄마랑 간 인제 자작나무숲, 엄마랑 간 두물머리, 엄마랑 간 길상사, 엄마랑 간 율동공원, 엄마랑 간 광교호수공원... 이렇게 엄마와의 추억도 많아졌다. 





몇 년이 지나 이제 엄마는 내 곁에 없다.

오랜 기간 내 곁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엄마는 

나의 바람과 달리 하늘나라에 먼저 갔지만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아직도 가끔 울며 엄마를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음을 멈추고 다시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애쓴다.

엄마 또한 그런 나를 더 좋아할 테니까, 내가 그러기를 바랄 테니까



충분히 울 시간이 필요하지만, 울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울음을 그쳤다면 이제 행복해질 차례다.

그리고 그 행복은 내가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처럼 노력없이는 만들 수 없다. 


하자, 행복.

그러기 위해 하자,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엄마보고싶다  #여전히그립다  #꿈에서데이트해줄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