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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하신가영 Apr 13. 2024

3년 만에 발견한 엄마 일기장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보내는 딸의 편지

지난주 금요일, 엄마의 3번째 기일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아이를 픽업해서 4시간 가까운 거리를 운전해서 친정에 갔다.


언니는 오전 일찍 먼저 내려가 아빠와 장을 보고, 제사 준비를 하고,

그리고 아빠 혼자 살아 먼지투성이인 집을 정리했다. 

책을 버리고, 오래된 것들을 버리고, 쓸고 닦고, 그러다가 엄마의 일기장이 발견되었다.


일기장을 펼쳐봤다.

아빠에 대한 원망, 아들의 불안한 삶에 대한 걱정,

그리고 끝없는 자식에 대한 미안함,

기억나지 않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엄마가 외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20년 넘게 뇌졸중 후유증으로 아픈 외할머니와 이모에 대한 미안함 등 

가계부와 함께 쓴 엄마의 일기장에는 엄마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날에는 

아빠가 받지 않을 걸 알면서 전화한 자신이 미련하다며 탓하기도 했고,

두 딸을 가진 오빠가 이혼을 한다면서 새벽에 자는 손주들을 데리고 와서 엄마에게 맡기고 갈 때는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외할아버지에게 본인을 데려가도 좋으니 

제발 아들만 행복하게, 정신 차리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도 있었다. 

국가검진에서 암소견을 받고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결과를 들었던 날에는

너무 무서워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적혀 있었고,

아빠와 심하게 다투고는 갈 곳이 없어서 큰 딸이 있는 천안버스터미널까지 와놓고선

사위 보기가 미안해서 천안 버스터미널에서 몇 시간을 앉아있다가 다시 진주를 돌아갔다고도 적혀있었다.

뇌에 암이 전이되어 뇌수술을 받았던 때에는 

며칠이 지나 삐뚤빼뚤 글씨로 기억들을 남겨 두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에서 깨자마자 딸들 걱정한다고, 엄마 괜찮으니 딸들에게 집에 가라고 이야기 좀 전해해 달라고 했다엄마의 말도 적혀있었다.


불행한 엄마의 삶은 내가 예상한 것처럼 너무나 슬펐고, 가여웠다.

언니와 나는 그 일기를 보고 펑펑 울었다. 





그중 엄마가 처음 암 4기인 걸 알았던 날 일기가 있었다.


엄마가 조직검사를 받았을 때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본인이 혹시나 4기면 항암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그래서였는지,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랬는지, 희망을 잃을까 봐 그랬던 건지, 

우리 가족은 엄마에게 4기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수술이 불가하다는 사실도 숨긴 채 항암 먼저 하고, 암이 조금 작아지면 수술한다고 그렇게 엄마에게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의사에게 수술을 언제 할 수 있냐고 물었고,

의사는 엄마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 당신은 4기라고, 수술이 불가하다고...

우리 앞에서는 왜 사실을 숨겼냐고 화냈지만

일기장에는 엄마에게 숨기고 있을 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미안하다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딸들에게 미안하다는 우리 엄마



                    

엄마의 몇 년 치의 일기를 읽고 나니 엄마에게 더 잘할걸, 이런 마음이 자꾸만 자꾸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일기를 읽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기도 했다.

엄마의 일기장에 힘들었다, 무섭다, 걱정된다는 내용만큼이나 많이 쓰여있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행복하다는 말이었다. 


병원진료가 끝나고 나와 같이 갔던 예쁜 카페에서 마신 진한 대추차에 행복하다고 했다.

나와 걸었던 공원에서 딸과 손을 잡고 걸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큰딸, 작은딸과 갔던 여행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딸들과 함께해서 행복하다고 했다.

병원을 다녀왔더니 사위가 준비해 둔 맛있는 밥과 국에 행복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먹은 점심과 커피 한잔에 행복하다고 했다.

신랑이 출장 갔던 날, 엄마와 같이 침대에서 잤는데, 딸과 함께 잘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아빠와 꽃을 보러 갔던 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운전을 못하던 언니가 운전을 배우고 엄마를 태우러 왔던 날, 큰 딸이 운전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가 병원에 오던 날이면 나와 네일케어를 받곤 했는데, 이렇게 호강을 받게 될 줄 몰랐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의 삶은 불행했지만, 또 행복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늘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 누구도 불행하기만 한 삶을 살진 않는다.

그 불행 속에서 행복은 이렇게 가끔 봄날의 새싹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런 순간들을 더 아끼고, 물을 주고, 햇빛을 줘야만 행복도 더 커지고 자주 경험할 수 있다.


 


행복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의무다.

나 또한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엄마가 그리운 마음으로

내 아이와 내 가정과 내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한다.


행복,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한 예의






엄마, 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엄마도 내가 딸이어서 행복했지?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참 좋았어.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많이 감사했어.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행복했어.


이제 그곳에서 아프지 말고

외할아버지 사랑 듬뿍 받고

예쁜 꽃 많이 보고 있다가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나도 이번 생에 행복한 순간들 많이 만들어서

엄마 다시 만나면 다 이야기해 줄게.


그리고 다음 생에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줄래?  

내가 정말 정말 많이 많이 사랑해 줄게.

이제 엄마의 일기장에 불행한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아질 수 있도록

매일매일 사랑한다 안아주고 얘기해 줄게.


사랑해. 엄마. 보고 싶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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