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우리집 마당에
벌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확실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전히 벌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그 뿌리를 쫓아가보면 이 사회가 내게 정규 학습과정이든, 텔레비전이나 미디어 같은 방식이든 각종 수단을 통해 내게 거듭 말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꿀벌은 무해할 뿐만 아니라 이 생태계에 매우 이롭다는 말 말이다. 애니메이션이든 동화책이든 꿀벌은 꼭 주인공을 돕는 캐릭터였다.
그리하여 꿀벌에겐 팔촌의 사돈이라 할 수 있는 쌍살벌이나 말벌들이 가끔 내게 가해 온 벼락같은 일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물론 안녕히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지만). 심지어 길을 걷다 꿀벌과 만나면 그곳이 어디든 나는 동화 속에 걸어 들어간 기분을 느꼈다. 꿀벌은 세상 충만한 감정을 느끼며 꽃을 즐겼다. 꽃 위에 앉은 모습을 보며 난 꿀벌 나라의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다.
살다 보니 상상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바로 우리 집 앞마당에서. 마을에서 오랫동안 양봉을 하셨던 선생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벌을 처분하신다고 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아니, 준비되지 않은 기회는 기회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꿀벌 마야의 대소동>을 본 시절과 지식수준이 다르지 않은 나는 무식하고도 용감한 손을 번쩍 들어 기어이 내 발등을 찍고 말았다.
선생님은 집 앞마당 한편에서 벌을 키우고 있었다. 자주 지나던 길인데도 벌통 단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오랫동안 알아온 선생님이지만. 오늘만큼 어두운 얼굴의 선생님을 뵌 적이 없다. 평생을 자식 같이 길러온 꿀벌과 이별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 벌통을 받으러 오는데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오는 인간(=나)에게 벌들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너 같은 놈에게 벌을 보내야 한다니…’. 때와 장소에 맞게 옷을 특별히 신경 써서 입는 나는 아니지만, 그날따라 나는 하필 노란색, 검은색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벌통을 받으러 왔는데 꿀벌 무늬 옷이라니. 해맑음을 어필하기엔 충분했다. 선생님은 긴급히 본인의 작업복을 챙겨 입혀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꿀벌의 상태를 살피셨다.
하늘은 높았고, 뭉게구름은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벌들은 봉장을 바삐 날아다녔다. 상상한 그대로였다. 벌들은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씰룩이는 엉덩이. 쉴 새 없이 분주한 분위기는 인간인 내게도 전달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생님은 훈연기에 불을 피웠다. 티비에서 보던 그 연기 뿜는 도구 말이다. ‘오 쑥불은 이런 냄새구나.’ 말린 쑥을 태운 연기는 분명 일산화탄소 가스임에도 나는 그 향이 좋아졌다.
선생님의 안내로 벌통 속을 처음 보게 되었다. 아, 나는 내 인생에 남겨두었어야 할 마지막 선물상자를 열어보고만 것이다. 언젠가 죽기 전,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물건 하나로 벌통은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 본 벌통 속은 생각보다 음침하고 너저분했다.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한 무언가들이 꾸덕꾸덕 붙어있었다. 여름날 몸에 달라붙는 장판 같았다. 청순가련해 보이는 꿀벌들이 이런 곳에 살았구나. 좋아하던 순정만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가 사실 수염 난 아저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충격받은 나를 두고 선생님은 토치에 불을 붙여 빈 벌통을 불태워 소독을 했다. 토치의 맹렬한 소리가 내 뒤통수에 들려왔다. 그러는 한편 선생님은 틈틈이 말벌을 배드민턴 채로 후려쳐 잡으셨다. 지옥불과 살육이 동시에 벌어지는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