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민방위 훈련
벌통 내부를 살피는 것을 내검內檢이라 한다. 벌통 뚜껑을 열고 봉순이들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준다. 병의 예후를 살피고, 여왕이 알을 잘 낳고 있는지 확인한다. 상황에 맞춰 벌집을 추가하거나 빼주고, 때에 따라 먹이를 넣어준다. 추운 날씨에는 내검을 자제하고, 그 외의 계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도 내검을 받았다. 생활관 점검이었다. 청소상태는 물론 개인 물품 정리상태를 보았다. 이불과 베개의 끝선이 수직이 되도록 갰는지, 옷장 속 정리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봉순이들이 고등학생은 아니지만, 내무반 상태를 검사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벌통 뚜껑을 열면, 봉순이들이 냅다 달려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하지만 열 때마다 겁난다. 뚜껑을 열면 면포가 덮여 있다. 개포를 걷어내고, 소비(벌집)를 꺼내도 봉순이들은 조용하다. 밭에 떨어져 있는 장판 조각이나 나무 기둥을 들추면 나오는 개미떼들이 사방으로 도망가는 것과 반응이 다르다. 벌들은 침착하다. 집 지붕이 날아갔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 없는 봉순이들은 본인들 일에 열중한다.
이게 익숙해진 나는 금세 건방져져서는 슬금슬금 방충복을 안 입기 시작했다. 방축복은 망사인데도 더웠다.
방충복은 꼭 입는 게 좋은 것 같다. 사회성 동물인 꿀벌은 무슨 일이든 혼자서 대처하지 않기 때문이다. 꿀벌은 위험을 감지하면 경보 페로몬을 뿌린다. 이 신호는 주변 자매벌들을 흥분시킨다. 전투태세로 만들며 성난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몰려든다. 수십 마리(벌침)가 붕붕 거리는데 침착함을 유지할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 세상에 늦은 일은 없다고 하지만 그때 방충복을 입는 건 정말 늦은 일이다. 꿀벌의 위험 페로몬 냄새가 바나나 향과 비슷하다는데, 다행인지 아직까진 그 열대과일 향은 맡아보지 못했다.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동물 옆에 갈 때는 예방을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벌통 점검에는 불이 필요하다. 진짜 불은 꿀벌도 나도 위험하니 연기를 만든다. 연기가 불이 난 것처럼 꿀벌을 속인다. 바로 훈연기다. 훈연기는 마른풀을 채워놓고 불을 붙여 풀무질로 연기가 뿜도록 만들어진 도구다. 훈연재로는 보통 말린 쑥을 쓴다. 여러 풀 중에 천천히 타는 쑥이 낙점된 것 같다. 다들 쑥이 최고라고 하니 나도 관습을 따르기로 했다. 검불이나, 나무조각, 종이 박스를 넣을 수도 있지만 쑥은 어디서나 잘 자라는 덕에 불만은 없다.
봄, 여름 언제든 베어 두어 마르면 쓴다.
양봉가를 양봉가답게 보여주는 도구 같아서 훈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욱하고 짙게 깔리는 연기. 중요한 연극 장면의 특수효과 같은 느낌이었다. 풀무질을 할 때 나는 ‘쑥쑥-' 소리도, 매캐한 쑥 타는 냄새도, 따땃한 연기도 몸의 여러 감각을 깨운다. 그런 훈연기를 드디어 써보다니. 은빛 스테인리스 메탈과 보드라운 인조가죽의 조화. 쑥을 채워놓고 토치 불을 댕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불을 제대로 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훈연기는 초보 티가 나게 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불이 붙었다 생각했는데 금방 꺼졌다. 연기가 필요할 때 이미 불 꺼진 훈연기는 싸늘한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훈연재를 적당히 채워 넣어야 하는데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에 쑥을 가득 채웠다. 숨구멍이 없는 불은 곧 꺼졌다.
벌통 뚜껑을 열고 벌집을 덮고 있는 면포를 걷어 연기를 뿜는다. 부드럽게 풀무질을 한다 쑥쑥-. 연기 냄새를 맡은 꿀벌은 '웨엥-' 놀라며 벌집 안으로 내려간다. 벌집 사이로도 연기를 뿜어준 후 잠시 기다린다. 연기는 꿀벌을 순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벌들이 태곳적부터 다듬어온 유전자에 담겨있다. 꿀벌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은 주로 나무구멍이었다. 그들은 숲에 살았다. 숲에서 살며 맞닥뜨릴 중대한 위협 한 가지는 불이었다. 그 당시 기술로는 그들은 불을 끄기 어려웠다. 다행히 산불에 적응한 종이 살아남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면 꿀벌들은 피난 준비를 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달려가 짐을 챙겼다. 꿀이었다.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원. 벌들은 뱃속에 있는 밀낭(꿀주머니)에 꿀을 채웠다. 배가 부르면 춘곤증을 느끼듯 꿀벌들도 늘어졌고, 배를 구부릴 수 없어 독침 발사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배가 부르면 침을 쏘지 못하는 돌연변이의 탄생은 꿀벌들의 생존에 유리한 결과가 되었다. 야생에서 식량은 정말 중요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귀한 재산을 가득 들고 있는 꿀벌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하다. 식량뿐만 아니라 일벌 한 마리가 공동체 재건 사업에 얼마나 큰 일꾼인가. 그런데 만약 이 놈이 성질 머리가 모나서 피난 와중 마주친 옆집 원수에게 복수한답시고 침이라도 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한번 더 참는 게 이기는 법이구나. 춘곤증 꿀벌이 번성했다. 양봉가들은 그 점을 노린다.
따지고 보면 연기로 꿀벌들이 온순해진다기보다는 비상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민방위 훈련을 하듯, 산불 시나리오대로 다들 꿀을 먹으러 집안으로 대피한다. 봉순이들이 순해지긴 하지만… 가벼운 거짓말도 진짜로 믿어버리는 조카에게 느끼는 듯한 미안함 마음이 들기도 하다. 꿀벌은 화재 상황이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난 준비를 진지하게 한다. 내검이 끝나고도 꿀벌 마을이 일상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꿀벌들이 방마다 고개를 집어넣고 엉덩이를 까딱거리며 꿀을 먹는 모습에는 어떤 천진난만함을 느낀다.
덧. 숲에 실제 불이 나도 야생 꿀벌은 도망가진 않는다고 한다. 불속을 날아 도망가기보다 은신처에서 꼭꼭 숨어있는 것이 오히려 안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