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통 세 통을 들여왔는데, 늦은 가을 벌 한 통을 잃었다. 다른 벌통에 비해 꿀벌들 출입(활동)이 적었다. 이상한 마음에 벌통을 얼른 열어보았다. 여왕벌은 살아있었지만, 숫자가 확연히 줄어있었다. 벌통이 비어있다시피 했다. 벌통 앞에 혀를 내밀고 죽은 벌들이 있었다. 꿀벌이 혀를 내밀고 죽는 것은 농약 중독이라 했다. 하지만 농약 피해만으로 몇 천 마리나 되는 수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을까. 이유가 어찌 됐든 내가 관리를 못해 꿀벌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여왕벌이 있었고, 생명의 불씨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정말 끝장나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한로는 가을의 끝자락에 있는 절기다. 한자 그대로 ‘차가운 이슬’이 내린다는 날이다. 하얀 서리가 내렸지만 낮은 따뜻했다. 아침은 조용하지만 낮이 되니 벌들이 부지런히 활동을 했다. 코스모스가 여전히 피어있었다. 환삼덩굴은 농부들에겐 따갑고 귀찮은 잡초지만 꿀벌에겐 꽃가루를 주는 식물이다. 꿀벌들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 가능한 많은 식량을 모으려 했다. 문득 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가 집까지 들렸다. 저 유명한 곡 <왕벌의 비행>에 나올법한 흥분한 벌들의 소리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장수말벌!?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벌통 앞에는 봉순이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물고 잡고 난리가 나고 있었다. 아귀다툼으로 벌집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섞여있는 패거리들의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우리 벌들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인데, 이 벌들은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줄무늬다. 노란색, 검은색 조합이 아닌 검은색, 노란색 조합이라니. 같은 말 같지만 분명 달랐다.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번뜩 깨닫게 됐다. 도봉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책에서 읽은 도봉이었다.
도둑벌이 드는 것을 도봉이라고 한다. 벌들도 지성이 있는지라, 꿀을 직접 구하는 것보다 모아놓은 꿀을 가져오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안다. 후각이 예민한 꿀벌들이 꿀향 가득 풍겨오는 다른 집 벌통을 기웃대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건강한 벌통에는 수많은 경비벌이 있기 때문에 도둑이 들어올 수가 없다. 황비홍 같은 무술실력으로 경비벌을 해치웠다 해도 수많은 일벌이 벌통 속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벌통처럼 힘이 없는 상태에선 경비벌이 거의 없을 테고, 침입자는 손쉽게 뚫고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가 자매들을 데려온다. 도봉 맛에 취한 벌들은 상대 벌집을 미친 듯이 뜯어대고 한 방울의 꿀도 남기지 않고 가져간다. 벌들에겐 생사를 건 전쟁, 패싸움이었다. 서로 끄덩이를 잡고, 침으로 찌르고, 다리에 매달렸다. 위험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우선 출입구를 좁혔다.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는 수를 줄여 들어오는 순간 뭇매를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입구가 줄어들자 흥분한 벌들은 벌통 바깥을 기어 다니며 맴돌았다. 들어갈 틈새를 찾으려고 말이다. 벌통 뚜껑의 환기구까지 뜯어먹을 기세였다. 순진무구한 이웃들이 좀비로 돌변한 영화 같았다.
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분무기를 가져다가 물도 뿌리고, 훈연기로 연기도 뿜어보았다. 도둑질에 취한 것을 도봉열이라고 하는데, 흥분에 취한 게 느껴졌다. 책에 나온 대로 빈 벌통으로 바꿔놓아 혼란스럽게 해보려 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보다 못해 벌통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돌아오는 벌도 들어오지 못하긴 하겠으나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날아오는 벌이 끊이지 않았다. 설마 하며 벌통을 살펴보았는데, 벌통 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미친 좀비들이 나무까지 뜯어먹은 것이다... 청테이프로 긴급 땜빵을 했다. 저녁즈음 혹시 들어오지 못한 외역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었는데, 벌통 속에서 시달린듯한(?) 도둑벌들이 비틀 거리며 기어 나왔다. 도봉은 다음날도 이어졌다. 벌통을 열어 보니 벌집이 넝마처럼 뜯겨있고 꿀이 비었다. 가을 햇볕은 평화로운데, 태풍이 지나갔다. 벌통을 접을 수밖에 없다.
덧. 나중에 보니 검은 바탕에 노란 줄무늬 꿀벌은 진짜 있었다. 흑색종 꿀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