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의 아버지께서 전화로 지령을 내려주셨다. 설탕물을 만들어서 꿀벌들에게 계속 주라고 말이다. 가을 동안 꿀벌은 겨울을 대비한 먹이를 마련해야 한다. 11월이 되기 전까지 벌집에 먹이를 가득 채워야 한다. 설탕물은 봉지에 담아 주기도 하고 벌통 안에 설탕물 통을 넣어주기도 한다. 꿀벌들은 공급받은 설탕물의 수분을 날려서 진하게 저장한다. 묽은 설탕물을 먹어선 안된다. 겨울 동안 배변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기 전에 수분 섭취를 피하는 것처럼.
11월 중순이 되었지만, 추위다운 추위가 오지 않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봄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나무들도 계절을 착각했다. 이웃집 개나리와 매화가 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날파리가 다시 깨어났고, 한낮에 집 주변을 날아다니는 꿀벌이 보였다. 포근하고 평화로운 날씨가 이어지는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지만 마냥 반길 수는 없었다. 세기말 영화가 시작되는 듯 징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다 한파가 닥쳤다. 곳곳에서 수도관이 터졌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나무에 부풀었던 꽃망울이 죽었다. 겨울이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추위에 맞춰 벌통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을 덮는 시기는 최저 기온이 영하가 되었을 때. 사실 꿀벌에게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꿀벌은 영하 40도 지역에서도 겨울을 날 수가 있다. 겨울을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습성이 생겼고, 이 덕분에 꿀벌들은 온 지구에 퍼질 수 있었다. 문제는 봄처럼 따뜻한 겨울이다.
활동하기 좋은 온도가 꿀벌에게 오히려 나쁘다니. 꿀벌의 생존 스텝이 꼬이기 때문이다. 봉순이들의 세계에는 겨울 벌이 따로 있다. 겨울벌과 여름벌이 유전적으로 다른 벌은 아니다. 똑같은 벌이지만, 수명이 서로 다르다. 활동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4월에서 10월까지 꽃이 피는 시기는 꿀벌의 활동기다. 이 시기에 태어난 꿀벌은 보통 40일을 살고, 육아와 꿀을 모아 오는 일을 한다. 겨울을 앞둔 10월이 되면 벌 마을에는 겨울벌이 태어난다. 겨울 벌은 6개월을 산다. 겨울 벌은 봄까지 견디는 일을 한다.
똑같은 일벌인데 겨울벌 수명이 여섯 배나 더 긴 이유는 무엇일까. 육아와 비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아를 하지 않는 덕에 생명 에너지인 ‘비텔로제닌’을 소모하지 않는다. 비텔로제닌은 꿀벌의 면역력과 노화, 수명과 연관되어 있다. 세상이 일정 온도 이하가 되면 꿀벌은 바깥 활동을 나가지 않는다. 그보다 더 추워지면 그 정보가 여왕벌에게까지 전해져 알도 더 이상 낳지 않는다.
겨울 동안 꿀벌은 꿀을 찾으러 가는 긴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어진다. 새로 태어나는 동생벌이 없으니, 애벌레를 돌보고 청소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니까 벌 마을에 농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곳간에 꿀이 넉넉히 채워져 있고, 중노동이 없는 기간. 고구마 삶아 먹고 구들장 불며 겨울을 보낸 선조들처럼. 물론 꿀벌 마을 전체 온도를 15도씨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비행 근육을 꾸준히 진동해야 한다. 중심부 온도는 무려 32도씨. 봄이 오고, 첫 동생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 6개월을 산다. 봄을 맞이한다는 것은 벌통에겐 또 한 번의 생명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날이 따뜻하면 꿀 마을은 휴지기를 끝내고 다시 재생산을 시작한다. 여왕벌은 새로운 일꾼을 낳기 시작한다. 육아 온도를 맞추기 위해 보일러를 더 세게 틀고, 벌들은 꽃을 찾아 바깥으로 나간다. 벌들은 일교차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비행하는 탓에 수명이 짧아진다. 꿀벌 공장이 겨울을 견디는 힘은 온도를 유지하는 일벌 머릿수에 있는데, 마릿수가 부족하면 겨울 동안 벌통은 온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1월 벌통 옆을 지나던 중. 벌통 속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통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조마조마하던 차에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