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9월이 되었지만 날은 여전히 덥다. 최고기온은 30도 선을 유지하고, 때때로 열대야까지 이어진다. 먼바다는 수온이 올라 흔하지 않게 동시에 여러 태풍이 발생했다. 우리나라로 다행히 오진 않았지만, 태풍이 장마전선을 올려 보냈다. 어찌 됐든 겨울은 올 것이기에 흙 생명들은 겨울 준비를 시작했다. 등검은말벌 형님들 방문주기도 짧아지고 있다. 한 마리씩 오던 형님들이 어느샌가 두세 마리씩 동시 방문하기도 한다. 형님들은 제물을 받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자주 보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말벌은 여전히 무섭다. 꿀벌 쪽에 감정이입 되어서도 그렇고 말벌은 그 자체로 무섭게 생겼다. 공포는 날고 있는 말벌을 크게 보이게 한다. '이렇게 큰 건 처음이야' 싶지만 막상 잡아보면 새끼손가락만 하다. 또 공포는 과잉된 흥분을 야기한다.
어느 날은 잡다 보니 연속 7마리를 잡게 되었다. 선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말벌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말벌이 피크를 향해가는 슬픈 현실 보다 지금 이 순간의 뿌듯함이 올라왔다. 그때 꿀벌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왔다. "스트리트 파이터"는 뭇 국민학생들에게 빠른 주먹은 장풍을 쏜다는 교훈을 주었고, 흥분한 잠자리채는 꿀벌들에게 벌침을 쏘게 했다. 잠자리채를 휘젓는 모습이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꿀벌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오더니, 빠져나가질 못했다. 웽웽. 이미 흥분해서 달려들었던 꿀벌은 머리카락에 걸려 패닉에 빠졌다. ㅅㅂ, 이렇게 된 거 죽기 전에 벌침이나 한번 쏘고 죽자.로 마음먹은 꿀벌은 비장한 벌침을 머리에 꽂았다.... 억울하니까 더 아프다.
여름이 익었고, 밭 한켠에 자리한 포도를 따러 갔다. 올해 많은 포도가 열렸다며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포도나무는 어느새 높게 자란 풀에 파묻혀 있었다. 수확시기를 놓친 포도는 포도를 먹으러 온 여러 날벌레 무리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절반은 나비, 나머지는 온갖 말벌들이 주렁주렁. 개중에는 장수말벌도 보였다. 아이고, 내가 벌통 가까운 곳에서 말벌들을 꾀고 있었구나. 이곳은 말 그대로 말벌들의 주지육림이었다. 포도는 포도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기는... 어? 아무래도 난가? 나무가 흔들리자 말벌들이 웽하고 날아올랐다. 벌통 앞에선 말벌이 소수였지만 여기선 내가 소수자였다. 후퇴다.
말벌 트랩이 생각났다. 그것은 말벌이 들어오면 나가지 못하는 함정이었다. 공 모양으로 생겼는데, 위로만 날아가려는 날벌레의 습성을 이용해 한번 들어온 말벌이 나가지 못하게 한다. 트랩에는 말벌이 좋아하는 유인액을 넣게 되어있다. 나무 수액이나 과일즙을 먹는 말벌의 후각을 자극한다. 원래 있던 유인액을 넣었는데, 아무래도 오래 지난 유인액이라 효과가 떨어질 것 같다. 포도를 첨가해야겠다.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를 따려다 나무가 흔들렸다. 온 벌레가 웽하고 날아올랐다. 온갖 나비와 말벌, 수십 마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장관 속에서 나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성질 고약한 말벌들은 내 앞에서 서로 싸움박질을 했다. 땀이 흘러내렸다. 하는 둥 마는 둥 설치하고 도망쳐 나왔다.
트랩은 바로 효과를 보였다. 바로 열 마리는 잡혔다. 이빨로 플라스틱 벽을 물었다. 갇혀있는 걸 알지만 무섭다. 말벌이 독을 쏠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지 못하고 두세 걸음 떨어져서 확인했다. 잡힌 말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무섭지만 뿌듯하다. 오래지 않아 장수말벌 같이 생긴 녀석이 트랩 주변을 배회했다. 크기가 비교 안될 만큼 크고, 얼굴이 주황빛이었다. 녀석은 포도에 관심이 있다거나 트랩 속 유인액에 관심은 없어 보였다. 오로지 트랩 속에 갇혀있는 자매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위기에 빠진 자매를 구하러 온 벌이었다. 구조를 온 것으로 보아 장수말벌이 확실했다. 장수말벌은 자매애가 강해 위기에 빠지면 동료에게 구출 신호(페로몬)를 보낸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자매들의 애틋한 상황이었다. 안과 밖에서 서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잠자리채를 가져와 구조를 온 장숙이도 같이 잡았다. 장숙이는 의외로 순순히 잡혀왔다. 등검은 형님과 다른 어떤 위엄이 느껴졌다. 내게 언니 벌을 풀어줄 것을 간청하려는 것일까.
그래, 너희 자매(말벌 군락도 전체가 암컷이다)의 우애가 갸륵해, 살려줄 터이니. 이제 살생은 저지르지 말고 착하게 살도록 노력하거라.라고 할 줄 알았지. 나는 쥐 끈끈이를 가져와 장숙이를 붙였다. 쥐를 잡는 끈끈이지만 장수말벌의 저항은 셌다. 끈끈이 따위 금방이라도 떨치고 날아오를 것 같았다. 나는 장수말벌을 뒤집어 날개까지 붙였다. 장수말벌은 봉순이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다. 한 마리가 벌통 하나를 박살 낼 수도 있다. 장숙이가 붙은 끈끈이를 산 입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장숙이들이 구조를 오는 습성을 이용해 일망타진해 보려는 속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