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이자와 겨울여행

큐가루이자와 긴자 거리를 따라 걸으며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사랑과 평화를

by 유연구지

JR도쿄와이드패스 마지막 하루치가 남았다.

묵힐 것인가 써먹을 것인가.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할머니가 되겠다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고마코와 약속하지 않았나.


가루이자와행 신칸센을 탔다.

존 레논오노 요코가 즐겨 찾았다는 아름다운 휴양지.

나가노현 남동부 아사마산 기슭에 있는

국제적인 고원 피서지로서

일본의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한다는 가루이자와.

나는 JR도쿄와이드패스의 마지막 남은 하루를

가루이자와행으로 택했다.

또 다른 열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가 발동했나 보다.


날이 좋다.

길을 떠나기에도 좋고

옛사람의 발자국을 더듬기에도 좋다.

도쿄역출발 1시간 7분 만에 도착

가루이자와 역에서

남쪽과 북쪽 출구를 양쪽에 두고

어디로 갈 것인지 갈등.


하루를 불태우자.

까짓 껏 낭만을 갈구하다

길 위에서 뜨겁게 전사한 할머니가 되는 게 낫다.

집 밖은 위험하다고 수동태로 살아진 삼 년은

회복의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남쪽도 가고 북쪽도 가자.

남쪽으로 먼저 나오니 스키장과 호수,

눈으로 뒤덮인 하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프린스쇼핑플라자라고 하지만

아웃렛, 쇼핑몰의 모양이라기보다 그냥 공원,

쉼터 같은 느낌이다.


과거 골프장이었던 곳을 일본 세이부 그룹이 18홀 중 9홀을 털어

녹지를 훼손하지 않고 만든 자연과 가족친화적인 아울렛이라고 한다.

방문객의 약 70%가 관광객이라는 자료도 있던데

코로나 시대 일본의 문이 닫힌 상태라 인적이 드물다.

저 멀리 어린아이 둘이서 눈을 뭉치고 눈싸움도 하고 뒹굴고 한다.

내 어린 손녀딸이 보고 싶다. 그녀와 나도 뒹굴고 싶다.


다시 역을 통과하여 새 마음으로 북쪽으로 나오니 마을이다.

마루야마 커피 본점을 찾아 철도길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눈길을 남편과 오랜만에 걷는다.

생각해보니 남편과 함께 걷는 것조차 오랜만이다.

오늘 하루 이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거구나.

나란히 걷는 남편이 낯설다.


숲길로 향한 입구에서 작은 펜션 같은 집 한 채를 찾았다.

마루야마 커피 본점이다.

창을 향하여 얼굴을 보이며 차를 마시기도 하고

노트북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현관문 같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다. 향이 좋다.

속닥이는 사람들 소리와 장작의 타는 소리,

주문받는 사람도 주문하는 사람도

모두 화음을 넣은 변주곡 연주 중인 것 같다.


마루야마 본점만의 메뉴를 골라 먹었다.

작은 공간이라 창을 들어선 햇빛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닿아 머문다.

공평하게 나누어 받는 기분이다.


꼬마 손님 가족이 들어오니 가게가 꽉 찬다.

마음 같아서는 내 집처럼 해가 물러나는 것까지 지키고 싶지만

나그넷길은 늘 부산스러운 것이지.

일어나 계산하니 옆방의 원두 판매방에서 녹차를 담아준다.

이놈의 정 같으니라고. 고맙다.

도자기공방에서 구워온 것 같은 그릇과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쁘다. 보기만 해도 이쁘다.


남편과 큐가루이자와 긴자까지 걸어가는 길은

공간적 길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남았다.

매일 하루 일과 중

남편은 나와 얼굴 마주하는 시간이 고작 두세 시간도 안 되는 셈이지.

차라리 직원들과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가.

그래서 남편인가 보다. 남의 편. 이젠 인정하자.


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시간을 엿보러 가루이자와에 왔다.

존 레논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가정폭력,

아들 줄리안 레논에 대한 아동방임 무책임함에 대한 생각은

일단 뒤로 하고 그와 오노 요코의 소소한 일상의 숨결을 담아 가자.


큐가루이자와 긴자 숲 속의 맘페이 호텔 128호에서

오노 요코와 아들 션과 자고 먹고 피아노 치고 노래하고,

긴자 길 따라 자전거 타고 내려와

프렌치 베이커리에서 바게트를 사고

오노 요코는 미카도 모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름다운가.

나는 신시아와 줄리안과 메이팡

그 밖의 존 레논의 여자들이 생각의 끝에 매달려 요동침을 느꼈다.

존 레논이 외도로 이혼하고 결혼한 오노 요코와의

가루이자와에서의 소소한 일상 아름다움 끝에

신시아와 줄리안의 무게로 축축 쳐져 땅바닥에 끌리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마을 입구 쪽에 삼각지붕의 독특한 교회건물로

미국 건축학회상을 받은 성 바오로 가톨릭 성당이 있다.

크지 않다.

저 삼각지붕을 유럽의 장엄하고 거대한 덩치의 교회 머리의

고딕 뾰족탑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나는 교회의 닫힌 문에 난 투명 십자가 모양의 창 안으로 보이는

제대의 십자가를 향하여 '용서하소서' 기도를 올렸다.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하여.


긴자 길 끝에 오르면

가루이자와에서 가장 오래된 쇼 기념 성공회 예배당이 있다.

정갈해서 성스럽다.

주눅 들게 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다 퍼주어서 남은 것이 가볍고 정갈한

따뜻한 하느님이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거대한 교회, 성지 증축이니 교회 확장 헌금 모금이니 하는 것에서

설마 하느님이 나를 약탈하는건가 하는 어리석은 의심이 자라던 나에게

하느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다만 그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가루이자와 역으로 오는 길에

카와카미안에서 나는 튀김냉소바, 남편은 오리고기온소바를 먹고 다시 걸었다.

식후 산보는 보약이라고 하지.

걷는 길에서 바라본 저무는 해가 너무 아름답다.

기차 역사에서 바라보는 붉게 타는 저녁노을은

오늘 하루를 붉게 태워 버린 나의 뒷모습 같았다.(끝)


Love is a promise, love is a souvenir, once given never forgotten, never let it disappear./John Lennon


Peace is not something you wish for, it`s something you make, something you do, something you are, and something you give away./ John Len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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