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lo유니 Dec 31. 2022

우리는 기적을 만났다.

         행복한 소식들이 찾아왔다.

기적(Miracle)이란,
상식을 벗어난 기이하고 놀라운 일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적도 없었고, 기적을 바랄 만큼의 큰 소망도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기적을 믿는다.


이민국에 퇴사 통보를 했다고 친절히 알려주는 S의 메일을 받은 지 한참이 지나도 이민국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사실 나와 남편은 처음에는 신경을 썼지만, 너무 바쁘게 지내느라 어느 날부터는 잊어버렸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생활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나는 다양한 나라의 동료들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이었고, 남편은 비자가 해결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아이들 영어만은 공부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큰아이 중학교 입시 시험에 무모한 도전장도 던졌다.


영국은 중학교를 진학할 때, 일반 공립학교 외에 11+라는 시험을 쳐서 선별적(Selective)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들이 있는데, 오랜 전통의 사립학교(Private School)와 좋은 공립학교인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과 같은 비평준화 학교를 말한다. 매년 많은 아이들이 지원하는 그 시험을 영어 알파벳도 모르고 영국 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가 1년 반 만에 도전했으니... 무모한 도전이 맞았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너무 바빴고, 현재에 집중, 또 집중하면서 살다 보니 어느새 수개월이 지났다.




언제부턴가 좋은 일이라고는 없던 우리의 삶에 처음으로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중학교 입시 시험에 딸아이가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150명 정원을 선발하는 데, 2,000여 명이 지원하는 학교에, 그것도 딸아이가 다니는 Primary School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유일하게 혼자 합격을 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만큼 학교에서도 놀랐다. 딸아이의 친구들과 학부모들이 많은 축하를 해주었고, 공부 방법 등 다양한 질문도 많이 받았다. 한국인 지인들은 서울대 붙은 것과 같다며 떡을 돌리라고 농담도 했다. 오랜만에 남편과 나의 어깨를 펴 준 딸에게 너무 고마웠다.  

딸아이의 학교는 영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그래머스쿨이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우연히 우리의 이야기를 (영국에 사는 어떤 젊은 부부가 비자가 정지되어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 들었다면,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는 K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함께 만난 K는 수수해 보이는 60대 남성이었고, 본인이 영국에서 비자 문제로 많이 고생했다며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고??"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들어보는 말에 선뜻 감사하다는 말이 안 나오고, 혹시나 또 속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남편과 K는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를 집중해서 들으면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K에 대한 신뢰도 평가를 하고 있었다.


K도 이민 초기에 비자 문제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 어떤 분의 도움으로 영국에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우연히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계속 마음에 걸려 남편의 연락처를 알아보고 전화를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다가도 우리를 보고는 푸근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고 있다가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주책없이... 놀란 남편이,


"당신, 괜찮아??”

"사모님이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그 맘 압니다. 제가 잘 알죠..."

내 마음을 안다는 그 말에 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정말 꾸욱~ 참았지만, 어깨가 들썩거린다.


K의 회사는 스폰서십이 없지만, 알아보니 가능하다며 우리를 위해 스폰서십 신청을 하겠다고 했다. 스폰서십이 나오면 빨리 비자 신청을 하자고 했고, 다만 급여를 일반 회사처럼 줄 수 없는 점이 미안하다고 했다. 도움을 주면서도 미안하다는 K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K는 우리와 만난 후, 이민국에 스폰서십을 신청하는 일을 진행하였고, 우리는 비자전문변호사를 찾아서 우리 상황에 대해 상담을 했다. 변호사는 좋은 상황이 아니라며, 일단 남편 비자만 먼저 신청해보자고 했다. 이전 회사를 그만 둔지 너무 오래돼서 위험성이 크다고 했다. 다행히 스폰서십은 무사히 발급되었고, 변호사의 의견대로 남편의 비자만 변경신청을 하였다


2014년 5월, 1년 2개월 만에 새 비자를 받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주변에서 우리 같은 일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하고, 변호사도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했다.




그렇게 새로운 비자를 받고, 더 이상 이민국의 연락을 신경 쓰는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남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나는 여전히 주야로 일을 해야 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K와도 잘 지냈고, 자녀가 없던 K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많이 예뻐해 주었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다이어리에 매일 날짜를 지워가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영주권을 받으면 남편이 좀 더 좋은 조건의 회사에 취업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나도 좀 쉴 수 있다는 기대만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날짜를 지워가며 지내다, 드디어 우리가 영국에 입국한 지 5년이 되었다. 취업비자로 5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아기다리고기다린... 그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영주권 신청에 필요한 영어시험과 영국에 대한 일반상식을 묻는 UK Life 테스트도 통과한 후, 당당히 변호사를 다시 찾았다.


"쿵!!"

남편과 내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다.


변호사는 영주권 신청을 위해 이민국에 신청하여 우리의 전체 기록들을 검토했더니 우리가 2012년 S의 회사를 퇴사한 후 비자가 종결된 기록이 있다고 했다. 더 기가 찬 것은 이민국이 두 차례나 우리에게 추방명령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민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없었다.


'이사도 안 가고 같은 집에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왜 편지를 못 받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의 자료에는 확실하게 우리 가족이 지난 1년 2개월 동안 영국에 불법체류하고 있었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변호사는 새 비자가 나온 것도 너무 놀랍다며, 다시 새 비자로 5년을 채워서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을 권하였다. 이번 영주권 신청은 불가능하니 자신이 도와줄 게 없다고도 하였다.  


'앞으로 3년을 더 있다가 영주권을 신청하라고??’


변호사의 말이 끝나고도 남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의자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모른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에 우리는 서로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일찍 잠이 들었다.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했다.


다음 날,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남편이 얘기를 하자고 했다.


"나 혼자 영주권 신청을 준비해 볼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주권 신청을 해봐야겠어. 안 그러면 후회할 것 같아. 이런 생활을 3년이나 더 할 수는 없어. 이번에도 일단 나만 먼저 신청해 볼게.."


"...."

평소에 나라면 남편의 말에 간섭도 많이 하고, 흥도 돋우는 편이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갑자기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영주권 신청'이라는 목표가 없어져서 급무기력 해졌다.


"알아서 해..."

간단히 그 말만 하고 또 일찍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 시간이 제일 편했다.




그날 이후 남편은 혼자서 이민국 홈페이지에 있는 영주권 신청 관련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고, 도움이 되겠다 싶은 사람은 다 만났다. 그렇게 집중하는 남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도 '혹시 저러다.. '라는 기대가 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가고 12월의 어느 날에 남편이 영주권 신청을 위한 당일서비스를 신청하였다고 했다. 결과를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었던 남편은 비용이 비싸더라고 그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12월의 어느 날이 되었다.

오전 11시에 예약이 되어있던 남편이 집을 나섰다. 고맙게도 K가 같이 가준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집에 남았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집에 엄마랑 있는 것이 좋아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아이들과의 놀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이 지나, 오후 3시가 됐는데도 남편에게 연락이 없다.

결과가 나빠서 집에 못 오는 건 아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띠리리릭..."

그렇게 빨리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다.


"자기야.. 우리 된 것 같아!!"

흥분한 남편의 목소리의 떨림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졌다.


"된 것 같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어... 정말 된 것 같아..!! 된 것 같아!!"

"빨리 와.. 빨리 집에 와.."


'된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말을 1시간쯤 후에 귀가한 남편이 설명해 주었다.   


영주권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아 남편도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담당자가 남편을 불러 질문을 했다고 한다.


"Why did other members of your family not apply for the ILR with you?" (왜 다른 가족들은 너와 함께 영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니?)

"How can your family live on your income?"

(네 월급으로 어떻게 너의 가족들이 살 수 있니?)


단, 두 가지 질문.. 우리가 걱정하던 불법체류기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편은 그 질문에 와이프가 아직 영어 시험을 못 봐서 함께 신청하지 않았고, 와이프도 일을 하고 있어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고 했다.


그 결과, 담당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에는 나의 소득 증명서류를 추가로 제출하면 영주권이 최종 승인이 될 것이라며 다음 주까지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듣는 사람마다 너무 놀라워한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고도 믿기지 않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영주권 신청 시 비자의 연속성 유지가 가장 기본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기이하고 놀라운 일, 바로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남편은 곧바로 나의 소득증명서류를 당당히 이민국에 보냈다.


2016년 1월, 남편의 영주권이 나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이 우리에게는 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영주권을 받은 날, 런던에서 우리 가족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만의 파티를 즐기고, 또 즐겼다.

화려한 런던 시내는 훌륭한 우리의 파티장이 되어준다.

어디선가 ‘지금 힘들더라도 모퉁이만 돌아가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고 버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그 희망이란 것을 정말 믿었고, 그래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최선이다.

<< 여기서 잠깐 >>

몇 개월 후,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프랑스 여행을 갔다. 즐겁게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Border Control(입국심사대)에서 여권과 영주권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인할 것이 있다며 우리 가족이 잡히는 일이 생겼다. 학창 시절에 교무실에도 불려 가본 적 없던 내가 아이들까지 데리고 입국심사 사무실에 잡혀있게 된 것이다. 1시간쯤 지난 후, 담당자가 와서는 우리가 비자가 취소되고 추방명령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 영주권을 가지고 있어 불가피하게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이민국에 영주권자임을 확인했다며 미안하다고 했고, 이민국 기록을 업데이트했다고 하였다. 다시 한번 무비자상태(불법체류)의 기록이 있으면 영주권 발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에게 일어난 신기한 일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특별한 경험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전 11화 영화 같이 살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