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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Nov 01. 2016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Jeux d'Enfants

사랑이 장난입니까? 네-! 

첫 번째, 진정한 행복에 관하여

어린이집에 다니던 7살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게 생각난다. 당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나는 초록색 풀잎이 우거진 동산에 올라앉아있는 집을 그렸다. 왜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그린 그림이 기억이 나냐면, 일단은 “행복”이라는 명확한 주제를 던져줘 어렵다고 느꼈던 첫 번째 과제였고, 두 번째로는 내가 그 그림에 코피를 쏟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림에 새빨간 동그라미가 생기는데, 그 순간의 이미지가 내겐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무튼, 내가 7살 무렵 느꼈던 행복은 아마 우리 집을 떠올렸을 때의 느낌, 흔히 어린이들이 그리는 지극히 상투적인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10년 뒤인 17살을 떠올려 보자면, 그때는 누군가가 내게 주제를 던져주지 않아도 혼자서 행복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행복이란 뭘까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별 감흥이 없다. 왜냐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느끼는 감정이며, 어디에서도 마음먹는 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정말 피곤했는데 꿀잠을 잤다거나, 점심으로 매일 순댓국을 먹다가 크림 파스타를 먹게 됐다거나, 손을 씻는데 비누 향기가 너무 좋다거나 하는 등의 아주 사소한 일에서, 어떤 값도 치르지 않고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시간만큼이나 무한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줄리앙과 소피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희귀하고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을 위한 방법으로 바보 같은 내기를 선택한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그들의 짓궂은 내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교장 앞에서 혼나는 와중에 오줌을 싸고, 일부러 음란한 말을 뱉으며 선생을 희롱한다. 그들은 서로 엄마의 부재와, 왕따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내기라는 방법을 선택했고, 물론 그 내기는 처음에는 서로에게 충분한 행복을 줬다. 그 나이 때야 아직 순수한 나이니 장난은 그저 장난일 뿐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행복을 향한 유일한 수단으로 내기를 선택하고 죽을 때까지 그 내기를 져버리지 못한다. 


극 중에서 줄리앙이 10년 동안 끊고 있던 내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광란의 질주를 하며 신나 하던 장면이 있다. 줄리앙은 이미 내기에 중독이 되어버렸고, 내기를 하는 것이 곧 그의 유일한 행복이 되어버린 것을 잘 알려주는 씬이다. 광란의 질주를 하는 줄리앙의 모습은 마치 마약을 하고 한껏 취한 사람의 표정 같다. 웃고 있으며 신나 보이지만 행복해 보이기보단 퇴폐적이다. 결국 소피와의 내기는 줄리앙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의 일상적인 행복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버리는 강렬한 자극에 불과하다. 


줄리앙과 소피 모두 스스로 “행복”이라고 여기는 “자극”을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른다. 줄리앙은 내기를 위해 아버지를 포기했고, 단란한 가정을 포기했고, 사랑도 포기했다. 소피 또한 남편을 포기했고, 꿈마저 포기해버렸다. 그들에게 행복이란 것은 가혹할 정도로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이 있다. 


「 Le vrai bonheur coûte peu : s'il est cher,
il n'est pas d'une bonne espece. 」

진정한 행복은 비싸지 않다. 만약 비싸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결국 줄리앙과 소피는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스스로의 인생마저도 일찍 포기해 버린 그들이 결국 행복했을까? 지독하게 비싼 값을 치르고 얻는 게 과연 진정한 행복이었을까? 단지 그들은 짧은 시간 지속되는 성취감 끝에 지독한 허무함을 느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두 번째. 자존심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나는 어느 순간 나보다 상대방을 더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될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꼈다. 항상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내가 어느 순간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을 깨닫는 순간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 상대방의 감정이 크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자존심에 금이 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별 뜻 없는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나와 같은 증상에 힘들어할 것이다. 


영화 속 줄리앙과 소피도 그렇다. 극 중에서는 소피가 먼저 용기를 내 줄리앙에게 고백을 하는데, 아마 소피는 줄리앙에게 느꼈던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오래전부터 해석하고 있었을 것이고, 오랜 시간 끝에 줄리앙에게서 확신을 얻기 위해 엄청난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앙은 소피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소피의 고백을 “내기”로 치부해버린다. 상대방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시해버린 진심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소피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만약 그 자리에서 줄리앙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면, 소피와 같은 마음이건 아니건 그들은 조금 더 성숙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줄리앙의 정중한 거절로 그들의 미묘한 관계가 정리가 됐다면, 아픈 성장통을 겪고 조금 더 성숙해졌을 것이고, 줄리앙이 소피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그들은 서로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조금씩 발전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앙과 소피는 자존심을 너무 세워 버렸다. 결국 그들은 서로 용서와 배반을 반복하며 자신이 상처 입은 만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노력하고, 통쾌해하면서 동시에 가슴 아파한다. 사랑보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그들의 모습이 과연 사랑일까 싶기도 하지만,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서로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매우 비정상적인 사랑이다. 가만 보면 둘은 사디스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소피를 골리기 위해 전신이 새빨갛게 탄 상대편 운전자의 머리맡에 장난감을 놓아두는 줄리앙의 모습, 줄리앙의 결혼식에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장난감을 굴려 보내는 소피의 모습은 저게 인간일까 싶을 정도로 오싹하다. 그들의 장난감은 어쩌면 서로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내기의 속성이 그렇다. “할 수 있어 , 없어?”라는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의 자존심을 걸고 내기에 임하게 된다. 내기를 건 쪽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담보로 쥐고 있는 것이고, 상대방이 내기에 이기면 다음 차례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담보로 넘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줄리앙과 소피의 사랑은 매우 비정상적이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내기” 때문에 서로를 끝까지 바라본다. 


스탕달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때에만 사랑이 생긴다.」고 했다. 자존심 싸움 때문에 그들은 절대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었고, 늘 악동처럼 도망 다니고 엇나갔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끝까지 애타게 만들고 서로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큰 요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 번째.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줄 줄 모른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줄리앙과 소피의 어린 시절을 아주 귀엽게 담아냈다. 그러나 그들의 어린 시절은 마냥 귀엽지만은 않았다. 먼저 줄리앙을 보자면, 엄마는 병에 걸린 중환자이고, 아빠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무서운 사람이다. 아마 줄리앙은 매우 외로웠을 것이다. 엄마에게 받아쓰기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랑하려는 줄리앙과, 그런 줄리앙에게 화를 내며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 줄리앙이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 했고, 또 외로워했을지가 상상된다. 줄리앙의 아빠는 마치 줄리앙이 모든 불상사의 원인인 것처럼 줄리앙을 미워하고 포용하지 않는다. 만약 아빠가 줄리앙이 왜 장난을 치는지, 얼마나 외로워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봤다면 먼 훗날 줄리앙과 의절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엄마가 저세상으로 떠나버리고,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아빠와 줄리앙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멀스멀 더 멀어진다. 아빠는 변함없이 줄리앙에게 윽박지르는 방법을 쓰고, 줄리앙은 그런 아빠에게 반항하는 방법을 쓴다. 아빠는 결국 대입시험을 앞둔 줄리앙에게 소피와의 관계를 끊으라며 화를 내는데, 줄리앙은 그런 아빠에게 내가 엄마를 죽인 게 아니라며 엉엉 울며 대답하고는 뛰쳐나간다. 이 부분은 줄리앙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이다. 아빠는 부인이 죽고 난 후, 조금 더 아들에게 애정을 쏟았어야 했고 보듬어줬어야 했다. 결국 줄리앙은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은 나비효과처럼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 것이다. 


소피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언니와 함께 사는 소피는 늘 언니에게 골칫덩이 같은 존재이다. 학교에서도 말썽만 피우고, 자신이 왕따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언니에게 소피는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고,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소피와 줄리앙 모두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야 할 나이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했거나 외로울 때면, 어린 시절부터 쭉 해왔던 방법 ,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방법인 내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한 그들은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에 더 서툰 것이다. 


「 L'adolescence est le seul temps ou l'on ait appris quelque chose. 」

“청소년기는 무언가를 배웠던 유일한 시간이다”


소피와 줄리앙 모두 그 유일한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다. 살다 보면 가족 이외에도 친구, 직장동료, 선후배 등과 수많은 관계를 맺게 되지만, 모든 관계에 앞서 가장 처음으로 겪게 되는 관계는 가족이다. 또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도 가족이다. 그런데 줄리앙과 소피는 청소년기에 불안정한 가족관계 안에서, 남들이 당연하게 배웠을 많은 것들을 놓쳐버린 것이다. 만약 그들이 어린 시절, 온전히 사랑받고 자랐다면 그들의 인생은 이렇게 장난처럼 흘러가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그들의 비극적인 인생을 매우 환상적이고 독특한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둘은 함께 시멘트에 묻히며 키스를 하는데, 어른이 된 줄리앙의 목소리로 진행되던 내레이션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린 줄리앙의 목소리로 나온다. 나는 그것이 줄리앙의 영혼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줄리앙의 육체는 죽고 영혼이 남았을 때, 줄리앙의 영혼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의 미성숙한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결국 감독도 시종일관 환상적이고 동화 같은 느낌을 주긴 했지만 줄리앙과 소피를 미성숙한 인간의 단면으로 보여준 게 아닐까? 결국 인생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에 놀아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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