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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Aug 27. 2018

백엔의 사랑

아파? 살아! 

얼마 전, 장거리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 내 나이가 60인데, 28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참 신기한게요. 

저희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어요. 월 화 일하고 수요일 쉬고, 목 금 일하고, 토요일 쉬고 이렇게요. 

하다 보니깐 늘 그 휴일만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루씩 쉬는 휴일만 기다리면서 지내다 보니까 벌써 이 일 한지 30년이 훌쩍 지나 있더라고요." 


창밖을 보며 그러려니 기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주말만 목빠져라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내고 있는데, 이 시간들이 쌓이면, 어느덧 환갑이 돼 청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을까 싶었다. 고작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내가 그리던 미래는 훨씬 찬란했는데, 언제부터 주말을 기다리며 한주를 '버티게' 되었을까. 이제는 더이상 무언가 시도하기도 싫고, 상처받기 무서워 숨기에 바빠진 스스로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영화 <백엔의 사랑> 속 주인공, 이치코도 비슷하다. 조카와 질펀한 엉덩이를 긁으며 비디오 게임을 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고, 아무런 목표도 없다. 유일한 움직임은 백엔샵에 가서 군것질거리와 만화책을 빌리는 것 뿐이다.그저  인공호흡기 달고 힘겹게 삶을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가 초라하다 생각하니, 걸음걸이도 구부정, 머리도 산발에 눈빛도 흐리멍텅하다. 


동네 체육관의 퇴물 복서, '바나나맨'을 좋아하며 반짝 인생에 재미를 느끼는 것 처럼 보였으나, 그것도 잠깐. 변태 동료에게 30년 넘게 지켜온 소중한 첫경험까지 뺏기고,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바나나맨에게 뒤통수도 대차게 맞는다. 가뜩이나 스스로가 싫은 상황에서 이런 일들까지 겹쳤으니, 나같으면 아마 수면제 백 알을 털어넣고 조용히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 거지같은 경험도 소중하다 

하지만, 오히려 지독하게 아픈 경험이 힘을 준 건지, 그녀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낸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땀이 쏟아질 정도로 열심히 하고,  시합에 나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저 숨만 쉬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을 땐 밋밋하기만 했던 인생이, 몇 번의 거지같은 경험을 하고 나니 비로소 색깔이 생기고, 묘한 활력이 흐른다. 


매몰차게 떠난 듯 했던 '바나나맨'도 그녀를 뒤에서 조용히 응원해주고 있다. 인생을 반 포기한듯 살아온 그는, 이치코의 '열심히 살려는 태도' 가 버거워 도망쳤지만, 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묵묵히 살핀다.



이치코는 결국 이 악물고 대회에 출전한다. 그녀의 상대는 천하무적이다. 혹시나 싶지만, 역시나 이변은 없이 참패. 눈은 팅팅 붓고, 숨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무작정 날리는 주먹은 번번이 빗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물고 일어나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인생이라는 지독한 놈을 상대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의 모습이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에 왼손으로 시원하게 한 방을 날리고 찬란하게 패배한다.


# 진짜 사랑은 묵묵히 함께 걸어가는 것 

늘 그녀 주변을 맴돌던 바나나맨은, 경기를 마치고 터덜 터덜 나오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무심한듯 툭, 밥 먹으러 가자며 손을 잡는 바나나맨. 이치코는 어린 아이처럼 울면서 그 손을 잡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다. 


가만 보면, 이치코는 가족들 앞에서도, 자신을 강간한 미친x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바나나맨 앞에서만은 어린아이처럼 운다. 바나나맨이 먹으라고 만들어준 스테이크가 너무 커서 울고, 경기에 져서 분해서 운다. 그의 앞에서만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바나나맨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솔직함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닥여 준다.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나 외로운 인생, 사랑이라는 게 왜 필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 아파? 살아! 

영화 엔딩에선 경쾌한 락 음악이 흘러 나온다. 아프지만, 살아내라는 내용이다. 

그리 긴 인생을 산 건 아니지만, 확실히 살아간다는 건 많이 아프고, 고독하고, 힘든 일이다. 언제 어디서 말도 안되는 일로 상처 받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 믿었던 인생에 배신당하는 일,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으면 사는 재미가 없다. 결국 선택은 우리 몫이다. 별별 경험 다 해보고 상처도 지독하게 받아 보면서 인생에 부딪힐 지, 아니면 상처받는 게 두려워 그저 인생을 버텨내기만 할 지.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치코'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아마, 인생에 다시 한 번 제대로 부딪혀 볼까? 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길 것 같다. 나 또한 마음을 좀 바꿨다. 되든 안 되든, 이것 저것 부딪혀 보기로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고, 설령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혹시 상처받게 되더라도 다시 한 번 품어 보기로 했다.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만 기다리며 이 금쪽같은 시간을 보내기엔 인생이 또 너무 짧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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