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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Dec 30. 2019

대도시의 사랑법

외롭고 축축한 

소싯적엔 하루에 영화를 세 편, 그것도 '풀집중'해서 볼 정도로 영화광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시큰둥했고 작은 대사, 장면 하나 조차 마음에 파고드는 게 없었다. 책은 더했다. 몇 페이지를 읽다가 접어두기 일쑤였고, 그저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진열하는 아이템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침대 옆 협탁에 몇 달째 놓여있는 깨끗한 책들을 보며, 사람이 이렇게 무미건조해질 수 있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그런 찰나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남자 친구 B와 교보문고에 갔다. 서로에게 책 선물을 주기 위해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베스트셀러 칸에 있던 보라색 표지의 책이 눈길을 끌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무언가 거창하고 유치하지만 매력 있는 제목이었다. 나는 콕 집어 이 책을 선물해달라고 말했고, 우리는 나란히 보라색 표지의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이 책은 첫 장부터 재밌었다. '너무 빨리 읽으면 아까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네 편의 연작소설로 이루어진 책의 주인공은 나와 얼추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고, 자취를 하고,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겪고, 외롭고 축축한 침대 위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것이 있다면 동성을 좋아한다는 것. 네 편 모두 너무나 재밌게 읽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책 마지막 부분에 실린 <늦은 우기의 바캉스>였다. 규호와의 이별, 그 뒷이야기를 그려낸 이야기였는데, 읽는데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공허함이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나에게도 깊숙이 전해졌다. 늦은 우기처럼 '축축'했다. 일상에서 상대만이 가진 무언가가 불현듯 느껴질 때, 코를 찡그리는 작은 습관이라던지 웃는 모습, 아니면 특유의 말투 같은 것들이 생각날 때, 같이 갔던 공간과 풍경이 떠오를 때... 이 모든 상황들을 어쩜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심금을 울리게 써놨는지. 바로 직전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둘의 특별하고도 평범한 연애 이야기가 쭉 나열돼서 그런지, 마치 내가 이별한 것 같이 아팠다. 두 번째 편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스물다섯의 불 같았던 사랑이 그려졌다면,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선 잔잔하지만 공기 같은,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은듯한 사랑이 느껴졌다. 


언젠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둘이 함께 누워있던 밤에, 규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카일리가 있음에도 그때 왜 선뜻 나와 사귀기로 했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도시의 사랑법' 중> 


요즘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규호와 같은 방식으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확신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 중>


사실 어느 게 좋다고 뽑기 어려울 정도로 네 편 모두 좋았다. 많은 부분에 공감했고 가슴이 저릿했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결국 영원한 건 어디에도 없다는 칼날 같은 진실이었다. 동성애 코드지만, 성별을 떠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별이라는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 좋았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동성애를 질병으로 생각하고 인정해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해 주인공이 끝까지 사과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달리 꽤나 솔직하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를 끝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주변 눈치를 크게 보지 않는다. 과연 나였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보수적인 곳에서 나의 성 정체성을 떳떳하게 밝히고 솔직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축축한지 느껴졌다. 마지막 단편이 이별 후의 뒷이야기여서 더 그랬다. 이별 후 일종의 '애도 기간'을 거치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오랜만에 책에 줄을 치며 읽었다. 무뎌진 감수성이 그나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앞으로 박상영 작가의 책은 다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부럽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또 그것을 모든 이들이 끄덕거리게 할 정도의 필력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 작가의 앞으로가 더욱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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