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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ping Hands Oct 26. 2024

소시민적 삶에의 몰두에서 벗어나기

나 하나가 달라진다고 뭐가 달라진다

몇년만에 다시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 이미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부터 만학도였지만, 몇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 지금은 만학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몇년간 손을 놓고 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니, 새삼 "배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이 크게 와닿는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은 늘 젊다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밥을 넘기듯 매일 조금씩 머리를 굴려보고 있다. 


코로나 시작 무렵 들었던 온라인 이론그룹에도 몇년만에 다시 등록하며 이번주부터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기업이나 학교, 기관에서 리더십 강의도 하고 있지만 이번 강의를 통해 또 어떤 지적 자극을 받을지, 내 사유의 지평과 시선이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멀어져 있던 학문의 세계에 오랜만에 다시 다가가는구나 싶기도 했다. 


강의를 들으며 나 역시 리더십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면서도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고민과 질문 없이, 단편적이고 나이브한 시선으로 리더십을 생각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리더가 되기 전에 우선 나 자신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내 삶의 리더가 되는 것, 나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동기부여와 삶의 길(way of life)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지혜를 구하는 여정. 거기서부터 진정 리더십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그리고 내가 나의 리더가 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삶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 때로는 리더로서, 때로는 팔로워로서 우리 모두가 리더이자 팔로워서로서 기능하며 그 두개의 역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춤추는 삶. 그럴 때 비로소 나와 타인, 나아가 공동체, 사회, 국가가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다. 


뒤늦게 박사논문을 시작하며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이 부분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논문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 논문을 통해 세상에 어떻게 기여하고 싶은가 하는 핵심질문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처음 통일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졌던 포부나 기대, 비전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인 나의 모습을 보며, 어느샌가부터 나는 그저 일개 '소시민'일 뿐이라고, 나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냐는 '지적 패배주의'(오늘 이론그룹을 진행하신 교수님의 표현이다)에 깊이 빠져있었음을 새삼 자각했다.


사실 이런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이 내 삶의 중심정서가 된 지는 몇년이 되었다. 십여년 넘게 몸담으며 몸과 마음을 바쳤던 신앙공동체가 무너지고(여전히 그곳에 있는 이들은 이 '무너졌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하지 않을듯하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잘못된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고,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봤자 일개 소시민이자 수많은 대중의 하나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인 '글쓰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세상에 내 책이 나온 뒤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여전히 현실은 그대로였다. 불의는 여전히 조금도 위축되거나 망설이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세를 확장하며 위용을 뽐냈고, 내 작은 소시민적 반항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비웃는 것 같았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고(안타깝게도 내게는 물맷돌이 없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그 모든 일들이 무용(無用)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뭐 그리 대단한 반항을 하지도 못한 주제에, 깊은 패배주의에 빠졌다. 나 하나 달라진다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그래봤자 나만 힘들고 아플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부터 달아나 소시민적 일상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마치 나치시대 독일국민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나 하나의 안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끄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은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은 자기방어 심리였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그저 흔한 이기심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그 무엇이 되었든, <사유하기>를 멈추기로 했던 지난 몇 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좋든 싫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다시 떠밀려온 운명의 수레바퀴인지, 아니면 내 잠재의식에 잠들어있던 죄책감과 자의식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인지, 나는 다시 <사유하기>라는 거울 앞에 마주섰다. 


내 안의 생각을 비추는 거울로서 <사유하기>는 그 어떤 거울보다도 투명하게 나를 비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도망칠 수도, 나를 숨길 수도 없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이 일순간 나를 덮치고, 내 삶의 메인 테마로 작동하려고 시시때때로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나는 다시 <사유하기>라는 평생의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전히 내 안에는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이 익숙하고 오래된 그늘처럼 드리워있다. 하지만, 사유하기가 내 영혼에 조금씩 햇살을 비추어주기를, 그리하여 마침내는 지적 패배주의의 그늘을 모두 거두어 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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