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거나, 도망가거나
낯선 외부의 자극이 왔을 때 우리의 반응은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간혹 자극이 너무 강력해서 공포가 너무 클 때는 얼어버리는(freeze) 반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보다 어렸던 20대, 30대 초반까지는 조직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나 내 기준에서 봤을 때 이건 아니라고 생각될 때(주로 공정성이나 정의에 관한 이슈를 건드렸을 경우) 소심하게 저항 혹은 반항(상대방이 내 반응의 심각도나 위협 정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냐에 따라 저항이 될지, 반항으로 간주될지 달라질 수 있다) 해본 후 바뀌지 않을 것 같으면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분명 남아있는 중보다는, 절이 싫으면 ‘떠나는’ 중 편에 속했다. 그때는 그것이 용기고, 의식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남아있던’ 중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 때로는 수동적이고 의식이 없다고 생각했고, 지나치게 순응적이라고 여겼다. 바꿀 수 없으면서, 싸울 것도 아니면서 남아서 조직에 수동적으로 동조하고 잘못된 시스템(내 입장에서는 ‘불의’라고도 볼 수 있는)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계속 연료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대의보다는 나의 삶, 가족, 사적 영역이 더 중요한 사람들. 그들의 소시민성이 싫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소시민적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볼까 하고 있다. 그들이라고 더럽고, 치사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왜 안 했을까. 하지만 그들에게는 대의만큼이나 가족과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매일의 소리 없는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스트레스를 견디는 높은 내성이 길러질 동안 ‘근면성’이라는 무기로 자신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내가 뭐라고 그들의 삶을 멋대로 폄하하거나 평가할 수 있을까.
생각이 이렇게 바뀌어가는 것은 현명해지고 있거나, 비겁해지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어느 쪽인지는 제삼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더 낫겠지만, 분명한 것은 나이가 들고 있기는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