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삶과 자기만의 방
세 번째로 스위스에 가기로 결정하면서 처음에는 한 달 정도만 머물러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고 조용히 갔다. 결과적으로는 한 달이 세 달이 되어 예상보다 오랜 기간 동안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떠나는 것은 나의 오랜 습성인가 싶기도 하다.
10여 년 전 필리핀에서 일 년간 살기로 결정했을 때도, 가까운 지인들 말고는 거의 알리지 않고 떠났다. 5년 전 로잔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출국 소식에 지인들은 놀람 반, 궁금함 반이라는 반응이었지만 그들의 그런 반응들을 뒤로하고 나는 내 갈길을 갔다. 이렇게 보면 누가 뭐라 하든,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떠나는 나의 방랑벽은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다.
작년 가을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며 스위스에 다시 갈 때 나도 그곳에 '나만의 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여성들이 자기의 힘으로 서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인 '방'과 경제적 독립을 위한 '안정적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야기했다. 비록 그녀 자신도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으로 생활했다는 점에서 자신이 주장한 바와는 상치되는 면이 있긴 했지만, 그런 그녀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나만의 방이 필요했다. 스위스에 다시 가기로 결정하면서, 통역을 돕기로 한 기관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기에 나에게 따로 선택권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든 작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롯한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 바람은 현실이 되어,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포근한 나만의 방이 생겼다.
무엇보다 2개의 커다란 창문이 나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마주 보고 있는 창문으로 맞바람이 시원하게 순환되고, 싱그러운 햇살과 녹음, 때로는 성가시다 싶을 정도로 언제나 열심히 지저귀는 새소리를 벗 삼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욕심을 내지 않으면 삶이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소중한 것들은 실상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햇살, 바람, 공기, 가족, 친구, 사랑, 관계 등. 물론 이런 소중한 것들을 잘 지키기 위해 노력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가지기 위해 값을 치러야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노동과 자본으로도 이것들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삶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들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이런 소박하지만 대단한 행복들을 늘 곁에 두고, 낮에는 일하고, 여유시간(주로 저녁)에는 글 쓰는 단순한 일상을 반복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대신 주경야작(晝耕夜作)하는 삶을 살았다. 겨울도 아니고, 반딧불이도 없는 관계로 아쉽게도 형설지공(螢雪之功) 하지는 못했다. 언젠가 겨울에 다시 가게 되면 도전해봐야겠다.
공부하며, 삶을 살며 몇 년 전부터 머릿속과 마음속을 늘 어지럽히던 주제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사람마다 잊고 지내든, 그냥 흘려보내든, 쉬이 잊지 못하고 마음속 한켠에 늘 붙잡아 두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언제나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나간 과거를 쉽게 잊거나 흘려보내지 못하고, 내 속에서 온전히 이해되고 소화될 때까지 붙잡고 늘어져 어떤 식으로든 다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연유에도 어쩌면 그런 성격이 크게 작용했던 건지도 모른다. 개인이 겪은 과거의 일들과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자아, 과거의 자아와 현재 자아 사이의 통합, 미래를 향한 전진. 이런 시퀀스적인 삶의 궤적을 분석하고,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
분야를 확장해 통일학을 공부하며 사회, 정치, 역사 영역으로 공부의 범위를 넓혀 가면서 과거사 청산이라는 주제에 몰입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연결고리라는 것은 언제나 내게 중요한 테마임에 분명했다. 과거를 안다는 것은 현재의 나와 우리를 만들어온 토양을 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미래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에도 나는 '나만의 방'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연결통로를 찾기 위해 괜스레 혼자 바빴다. 어쩌면 '로잔'이라는 도시, '스위스'라는 나라 자체가 나에겐 '나만의 방'이었는지도 모른다.
5년 전 두 번째로 스위스에 왔을 때 나의 마음가짐이 그랬기 때문이다. 미처 다 소화되지 않은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의 사건들이 옷장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옷 무더기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복잡하게 쌓여있었다. 통합되지 않은 채 분열되어 있던 사건과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추고 싶어서 나는 이 먼 스위스까지 왔던 것이다.
몇 년 주기가 되었든 그렇게 때마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달리는 열차에 올라탔고, 결국 '글쓰기'라는 종착역에 도달했다. 나의 글 쓰기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받기 위한 도구다. 동시에 나를 위로하고,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3개월간 부지런히 달리고 달려, 마침내 초고를 완성했다. 머지않은 미래의 적당한 때에, 세상 빛을 보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친한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만약 신앙이 없었다면 이렇게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향은 '역마살'이란 말이 딱 맞는다고. 다행히 신앙이 있는 관계로 역마살이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순화된 '방랑벽' 또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대체어를 찾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같은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정착'과 '집'에 대한 갈망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느낀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실상 이 지구 상에서 짧은 시간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로서의 우리 삶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때가 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짐 싸기와 짐 풀기, 이동, 새로운 사람과 낯선 장소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지칠 때가 있다. 머무는 동안은 틀림없이 온전한 내 집, 혹은 내 방이지만 임시로 머물다 떠날 때가 오면 어김없이 길을 나서야 하는 그 모든 과정이 피로할 때가 있다.
하지만 머무름과 떠남,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항상 줄다리기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감내해야 할 삶의 필연적 과정이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나지 않고 머무르기만 할 수 있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때가 되면 이동해야 하는 우리는 유목민이다.
3개월의 스위스 체류 기간 중에도 그렇게 소원하던 '나만의 방'과 작별을 고하고, 또 다른 방과의 만남을 가졌다. 스위스 체류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한국에 돌아오기 전 몇 주간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던 나를 위해 지인이 방을 내어준 것이다. 지인도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간살이도 미처 다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지만, 객식구로 얹혀 지내는 나로서는 충분히 훌륭하고 감사해할 만한 곳이었다. 사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이번 스위스 세 달 살기 때도 그랬고, 유럽에 올 때마다 참 다양한 사람들 집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무위도식했다. 무위도식이라니, 뻔뻔하고 쓸모없는 잉여인간을 위한 수식어인 것 같아 어감이 상당히 부정적이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내가 그 주체가 되었을 때는 그 기간이 무한정으로 늘어나지만 않는다면 안빈낙도, 유유자적의 유토피아적 이상향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안빈낙도의 삶은 내게 한국에 돌아오기 전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집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 어디든 내 집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31 가지 맛 아이스크림도 아니건만 스위스에 올 때마다 감사하게도 기꺼이 방을 내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떠돌이 유목민 같은 나는 '집'과 같은 환대와 따뜻함을 경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을 내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집이 없지만 또 어디에나 집이 있는 행복한 나그네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