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동물 친구들
스위스에서 머무르는 세 달간 거의 매일 숲으로 산책을 갔다. 숙소 바로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숲길을 따라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30분씩 걸으며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채웠다.
5년 전 두 번째로 스위스에 왔을 때도 이따금씩 산책을 즐기곤 했다. 산책하는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쉼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도시에서 자라 늘 많은 사람과 인위적인 소음, 분주함에 익숙했던 내가 온전히 그 시간에 집중하고 존재하는 것, 자연이 안겨주는 소리, 작은 움직임들에 집중하는 순간이 주는 충만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바람소리, 새소리, 겨울이면 여린 나뭇가지가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하고 떨어내는 소리, 그 순간 나뭇가지의 떨림과 흩날리던 눈, 눈에 반사된 햇빛의 눈부심, 발 밑으로 밟히던 나뭇조각들의 촉감, 봄 들판에, 길가에 잔뜩 핀 색색깔의 야생화.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서 일생을 보내며 빌딩 숲과 네온사인, 자동차 소리, 매연 등에만 익숙했던 내게 자연이 이렇게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선 숲 속에서 머릿속의 자동적 사고 회로를 잠시 멈추고 자연이 주는 것들로 내 안을 채우다 보면 평온함이라는 선물이 덤으로 주어졌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는 핀란드 사람들의 행복한 삶의 이유로 '숲이 주는 여유'가 그 비밀일 거라고 했다. 나 역시 한국에 돌아온 후 한동안 그 여유가 참 많이 그리웠다.
그래서 세 달 살기로 스위스를 세 번째로 찾았을 때는 매일같이 꾸준히 산책을 갔다. 알아주는 길치인 덕분에 혼자 숲에서 길을 잃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로, 매일 조금씩 더 멀리 영역을 넓혀가며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다. 그러면서 작은 성공이 주는 성취감과 자신감도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누군가가 동행할 때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혼자 산책했다. 하지만 항상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숲 속의 동물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한 동키 하우스(donkey house)의 당나귀와 거위들에게 매일 인사를 건네고, 숲 속에 둥지를 튼 새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걸었다. 운이 좋은 날은 어두운 숲 속에서 혹은 길 한가운데서 사슴을 만나기도 했다. 세 달간 사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매일 산책 때마다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마음을 졸였지만, 지인은 사슴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애걸복걸할게 아니라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아쉬워하면 사슴이 안 나타난다나.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사슴을 보고 싶어 했던 나는 세 달간 딱 두 번 본 귀한 사슴을, 지인은 산책 갈 때마다 심심치 않게 봤다는 것이다. 사슴을 만나기 위한 마음가짐이 세상살이에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닮은 것도 같다.
어쨌든, 지인의 말마따나 사슴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터덜 터덜 숲 속을 걷던 어느 날, 눈앞에 뭔가 크고 빠른 생명체가 지나쳐갔다. 노란 빛깔의 둥그렇고 토실토실한 뭔가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멀어져 가는 사슴 궁둥이가 보였다. 풀숲으로 들어간 사슴은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사슴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 뭔가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산책길의 동물 친구는 양 떼였다. 올봄 스위스에서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고 이례적으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는데, 5월 말쯤부터 날씨가 풀리면서 풀밭에 방목해 놓은 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소와 양 목에 워낭을 달아놓는데, 짤랑짤랑 소리가 아주 맑고 듣기에 좋다.
평소 가던 산책 코스가 아닌,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언덕 위의 교회까지 산책을 가는 날이면 들판에서 풀을 뜯는 소떼와 말들도 볼 수 있었다. 처음 스위스에 와서 소와 양들을 볼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와 양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좁고 낙후된 축사에 갇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리나라의 소들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소들도 스위스 소들처럼 자유롭게 초원을 뛰어다니며 풀을 뜯고 쉬고 하면 좋을 텐데.
소뿐만 아니라 스위스에서는 전반적으로 동물들의 삶의 질이 좋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숲에서 산책을 하든, 시내 레스토랑이나 백화점을 가든 반려견들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위스에서는 반려견을 키우려면 등록을 하고 학교에 보내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숲 속에서 산책을 할 때 본 수많은 개들 중 한 마리도 공격적이거나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는 개를 본 적이 없다. 단순히 반려견을 데려와서 키운다는 개념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준비 과정을 거치고 그들과 삶의 많은 영역을 공유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반려견 문화가 많이 개선되고 성숙되고 있는 것 같지만, 동물들을 대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자세에서 배울 점이 많은 듯싶다.
비단 동물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아이들, 장애인들과 같은 약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스위스는 선진적인 면이 있다. 장애인들의 외부 활동이나 이동이 쉽지 않은 국내 환경에 비해 스위스는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 같다. 휠체어를 타고도 산책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국립공원 등에서 산책하는 것 등 일상의 곳곳에서 이들이 삶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에 맞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중에도 아이들은 실외든 실내든 마스크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인상 깊었다. 물론 장단이 있겠지만,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작년, 올해 태어난 아기들의 경우 날 때부터 마스크를 껴왔기에 마스크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어린아이들 역시 손 소독이 일상화되었다고 한다.
코로나의 위험은 스위스에도 여전히 있지만, 마스크 착용이 당연시되는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소한 경험의 차이가 누적되어 사회적 규범이나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개념을 형성해 갈 텐데, 건강과 안전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고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