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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산행하기

마터호른과 엄마와의 여행

by Helping Hands

스위스에 머무는 세 달간 주중에는 통역과 글쓰기라는 정해진 일과로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면 시내나 근교 지역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곤 했다. 늦봄까지 유난히 비도 많이 오고 초겨울처럼 추운 날이 계속 이어지던 중 다행히 좋은 날씨를 만난 어느 토요일, 체르마트마터호른을 다녀왔다.



체르마트와 마터호른


마터호른으로 오르기 위한 길에 있는 마을인 체르마트에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5년 전 로잔에서 살 때도 이미 한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마터호른은 삼각형 모양의 토블론(TOBLERONE) 초콜릿 로고에 각인된 산봉우리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마터호른을 찾을 때면 토블론 초콜릿을 사서 실제 마터호른 정상에 로고 모양을 맞춘 사진을 기념으로 남긴다.


마터호른과 토블론 초콜릿

체르마트에는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을 위한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위스 마을들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규모가 크지는 않아서 천천히 둘러보아도 2~3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은 마터호른으로부터 내려와 맑고 투명한 빛을 자랑한다.



산을 오르기보다,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학창 시절 특별활동으로 등산부에서 활동했던지라 나름대로 등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다. 중학교 때이긴 하지만 북한산 백운대도 등정했고, 신입사원 시절 제주에서 연수를 받을 때 동기들과 한라산에서 겨울 산행을 했을 때도 백록담까지 그리 힘들지 않게 올랐다.


하지만 한국과 스위스 알프스의 지형 자체가 많이 달라서인지, 처음 왔던 때의 마터호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산허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급경사 구간도 많고 생각보다 산행이 쉽지 않아서, 결국 허리가 좋지 않았던 단짝 친구와 중간에 문명의 이기(利器)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니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지점에 단 4분 만에 도착했다. 비록 고생하고 땀 흘려 산을 오를 때의 뿌듯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4분 만에 이렇게 쉽게 도착할 수 있다니,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친구와 만족했다.


이번 마터호른 방문에서는 그마저도 하지 않기로 했다. 배부른 소리 같지만 이미 스위스에서는 어느 정도 하이킹도 많이 해봤고, 이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서 무리하며 올라가는 것보다 체르마트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여행할 때면 늘 무언가 쫓기듯이 바쁜 일정을 짜서 5분 단위로 움직이던 나였는데, 나이가 들고 나름 여행의 관록이 쌓이니 조금씩 여유와 게으름도 늘어간다.


함께 한 일행 중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친구들과 잠시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맑은 하늘과 사람들,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커피 한잔이 주는 여유와 살짝 쌀쌀한 듯 시원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공기가 좋았다. 그리고 이내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혼자 마을을 둘러보았다.


카페에서 바라본 풍경. 휴일이라 축구장에서 공을 차는 학생들도 보였다.


마을 구석구석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며 수제 목각인형, 엽서, 치즈가게, 와인가게 등을 둘러보았다. 일행이 있어도 늘 어느샌가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한 나의 성향도 참, 자발적 외톨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을을 한 바퀴 다 돌아보고 나서 이제 뭘 할까 고민하던 찰나, 시냇가를 따라 마을 끝자락까지 걷다 보니 마터호른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마터호른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의 하이킹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힘들 것 같아 하이킹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마터호른을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언덕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산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는 어차피 산속에 들어가면 주변에 보이는 건 숲과 바위뿐이고 시야가 차단되어 정작 마터호른은 잘 안 보인다는 과거 경험으로부터의 배움도 한몫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큰 산이나 건물 같은 것들은 가까이서 보면 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멀리서, 높은 곳에서 보아야 전체적인 풍경이 눈에 담긴다. 인생에서 무언가 목표를 갖고 살아갈 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따금씩 생각해본다. 너무 몰입하고 가까이 있으면 정작 원하는 것,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하이킹 코스는 사방이 뚫려 있어서 마터호른도 정면으로 잘 보이고, 오르기에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5~10분 정도 언덕길을 올라 보이는 대로 잔디밭 아무 곳에나 앉았다. 쨍한 햇볕 아래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몇 년 전 꿨던 꿈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한 엄마와의 여행


그날은 꽤 오랜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는데, 꿈에서 엄마와 나는 함께 스위스 여행 중이었다. 패키지 데이 투어로 마터호른을 보기 위해 근처 마을까지 도착해 마터호른으로 오르는 방향을 확인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저기 보이는 건물을 끼고 쭉 올라가면 마터호른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런데 올라가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 테니 그냥 마을만 보고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엄마가 멀리서라도 마터호른을 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자고 나는 엄마를 이끌고 비탈길을 따라 시내를 구경했다. 꿈에선 엄마가 아플 때 그랬던 것처럼 못 움직이고, 음성 지원도 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엄마가 나올 때면 항상 꿈인데도 이제 아프지 않냐고 묻곤 하는데, 꿈에서까지 현실 검증을 하려는 걸 보면 자각몽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날 꿈에서는 엄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걷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렇게라도 나란히 걷고 엄마 목소리를 듣고, 말투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배가 고픈 엄마가 풋사과가 먹고 싶다고 해서 옆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사과 세 알을 사고 값을 치렀다.

돌아 내려가는 길, 반팔을 입고 있던 엄마가 추워 보여서 긴팔 카디건을 입고 있던 나는 백허그를 하며 엄마에게 카디건을 덮어주었다. 꿈에서 깬 뒤 벗어줄걸 그랬나 아쉬움이 남았다.


이 꿈 전에 꾸었던 다른 꿈에서는 엄마랑 파리에 가서 시내 구경도 하고, 베르사유도 둘러봤다.


마터호른에서 함께 산행하는 꿈을 꾸고 나서 다음에는 함께 어디로 여행을 가게 될지 기대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다음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곳을 여행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아니면 그곳도 코로나로 하늘 길이 막힌 걸까.


마을을 지내는 시내와 멀리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터호른
하이킹 코스에서 바라본 마터호른




혼자 하는 여행의 매력


원래도 여행을 좋아했지만, 엄마가 떠난 후 세계 각국으로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최근에는 점점 혼자 하는 여행의 빈도와 기간이 늘어가고 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서글픈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제일 아쉬울 때는 사진 찍을 때와 밥 먹을 때인데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는 것, 다양한 메뉴를 시켜서 조금씩 맛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치명적 단점이다. 하지만 그 단점을 잘 극복하면 혼자 여행을 통해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말 안 통하는 외국이니 혼잣말도 점점 늘고,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나 자신에게 "~~ 해볼까?", "~갈래?"라고 말을 걸면서 나를 더 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에게 일정이나 동선을 맞출 필요 없이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을 때에 따라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렇게 혼자에 익숙해지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와 사이좋게 혼자서도 잘 지내다 보면 둘이서, 셋이서도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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