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와 길 잃는 것이 일상인 여행
5년 전 스위스에 일 년 간 살 때는 막상 스위스 안에서의 국내여행은 많이 하지 않았다. 워낙 스위스 물가가 비싸다 보니 숙박비나 교통비, 음식비 등을 감안하면 국내에서의 이동이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다른 국가로 여행하는 것보다 경비나 시간 면에서 모두 특별한 이점이 없어 보였다. 가난한 방랑객 신분으로 스위스에 일 년간 머무는 것 자체로 많은 부담이 되었기에, 그때는 스위스 국내를 다니는 것보다 파리, 밀라노 같은 이웃나라의 도시들로 오히려 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운 좋게도 스위스에서 백신을 맞기는 했지만 유럽 안에서도 코로나의 위험이 계속되고 있었고, 한국에 입국할 때 해외 백신접종자는 대사관에 서류를 제출하고 심사를 통과하면 자가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기는 했지만 입국을 앞두고 국경을 옮겨 다닌다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을 다녀보기로 했다.
2박 3일의 일정 중 첫날에는 로잔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반나절 동안 라인 폭포(Rheinfall)와 샤프하우젠(Schaffhausen)을 둘러보고 난 후 장크트갈렌(St.Gallen)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동선을 짰다. 이튿날에는 장크트갈렌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인접해 있는 남부의 루가노(Lugano)라는 도시를 당일치기 여행하고, 다음날에는 로잔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원래는 그 사이에 생 모리츠(St.Moriz) 지역도 다녀올까 했는데 이미 충분히 빠듯한 일정이라며 말려준 지인의 혜안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에서 동선이 마무리되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한 번 갈아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라인 폭포 근처에서 내렸다. 마을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폭포 입구에 다다랐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스위스 여행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라인 폭포다. 나이아가라나 빅토리아 폭포에 비하면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유럽 최대의 폭포라고 한다.
폭포 주변으로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잘 갖춰져 있어서 위, 아래,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평일임에도 관광객들로 붐벼서 그런지 상쾌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는데, 시원하게 흐르는 폭포의 물줄기 덕분인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호수 가운데에는 보트 투어 선착장과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상점 등이 자리한 성이 있었다. 보트 투어 비용은 9 CHF(한화 12,000원) 정도로 스위스의 살벌한 물가 치고는 저렴한 편이었다. 다양한 루트 중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호수를 가로질러 폭포 아래까지 다녀오는 핑크색 보트를 타기로 했다.
표를 예매하고 승선 시간이 다 되어 보트에 오르자, 스무 명 남짓 탄 작은 보트가 물살을 가로지르며 호수를 따라 내려갔다. 호숫가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과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집들이 운치를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트가 폭포로 다가갔다. 차가운 물방울이 이따금씩 튀기도 하고, 보트가 출렁일 때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이 좋아했다. 코로나 시기에 스위스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나조차 알지 못했고, 계획하지 않았던 일인데 인생이란 참 재미있다.
보트에서 내리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호수 위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대구 튀김과 이곳 특산물인듯한 라인 폭포 맥주를 주문했다. 비록 와인 1/5잔에 취하는 알코올 쓰레기이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왠지 한 잔 마셔줘야 할 것 같았다. 소박한 점심이지만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또 다른 찬 삼아 먹다 보니 참 호사스러운 식사다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아쉽고 아까운 일인지!
라인 폭포에서 가벼운 산책으로 폭포와 작별인사를 한 후, 샤프하우젠으로 이동했다. 어느 여행에서나 그렇듯 이 날도 실수를 했는데, 그 덕분에 샤프하우젠에서의 여행이 생각보다 하드코어가 되었다.
라인 폭포로 가기 전 기차에서 내려 무거운 캐리어를 기차역 안의 라커에 보관했다. 라커 위치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아서 꽤 헤매다가 어렵게 찾았는데, 보관 비용이 8 CHF이었다. 그렇다. 스위스에서는 일단 그냥 나오면 모든 게 돈이다. 그래도 무겁게 캐리어를 들고 다닐 순 없으니 락커에 보관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
로잔에서 날씨가 계속 추웠던지라 추운 날씨를 예상하고 두꺼운 니트를 입고 갔는데, 예상보다 날씨가 훨씬 따뜻해진 덕분에 라인 폭포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다녔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동선상 돌아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차역에 들러서 캐리어에서 반팔 옷을 꺼내 갈아입기로 했다.
락커 문을 열고 옷을 꺼내 갈아입고 나니 훨씬 시원했다. '아, 아까 처음 도착했을 때 진작 갈아입었으면 좋았을 걸. 그래도 지금이라도 갈아입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락커 문을 잠그려는데, 아뿔싸! 한번 연 락커는 다시 잠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잠그려면 다시 8 CHF을 내야 하는데 어떡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시 잠그고 몸이 편한 것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팔운동 한다 치고 조금 아껴서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할 것인가. 8 CHF 자체가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미 낸 8 CHF을 합쳐서 생각하니 몇 시간 짐 보관에만 2만 원을 쓴다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캐리어를 가지고 샤프하우젠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잠시 후 후회로 바뀌었다.
샤프하우젠에 도착해서 마을 풍경을 잘 볼 수 있다는 무노트 요새로 향했다. 유럽의 보도 환경은 캐리어를 가지고 다니는 여행객들에게는 상당히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다. 몇 백 년된 건물과 보도들을 지금도 사용하다 보니, 미관상으로는 아름답고 정취 있지만 캐리어 바퀴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어쨌든 그렇게 힘들게 캐리어를 끌고 무노트 요새 앞까지 도달했다.
산비탈을 따라 일궈놓은 포도밭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무노트 요새를 만날 수 있다. 캐리어만 없었다면 오르기에 전혀 부담되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쾌한 바람도 맞고, 향긋한 포도 내음, 풀내음도 맡으며 쉬엄쉬엄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캐리어를 들고 있는 나에게는 상황이 달랐다.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라는 말이 있는 건가 싶다. 그때 그 락커 문을 열지만 않았어도, 아니 애초에 락커를 잠그기 전 반팔 옷을 꺼내서 니트 안에 받쳐 입는 부지런만 떨었어도, 아니 그깟 8 CHF이 뭐라고 그냥 아끼지 말고 다시 락커에 보관했으면 지금 이 고생은 안 할 텐데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나에겐 아직 쓸만한 두 다리와 튼튼한 두 팔이 있으니, 힘을 내서 한번 올라가 보자.
요새로 올라가는 길은 하필 좁은 외길이어서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 산비탈에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 동양인 여자를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싶었다. '참 너도 사서 고생이구나. 혼자 여행하느라 수고가 많다. 쯧쯧.' 하고 안쓰러워하려나.
어쨌든, 양손 자유로운 그들이 부러웠지만 그렇게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같은 그 포도밭길을 묵묵히 올랐다.
이윽고 요새에 도착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거쳐 성 꼭대기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마을을 관통하는 강과 샤프하우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힘들게 올라온 만큼 이 광경이 더욱 아름답고 값져 보였다. 아직 거친 숨을 내쉬며, 마을을 쭉 눈으로 살폈다.
지금도 이 날의 여행을 떠올리면 다른 어떤 것보다 힘들게 캐리어를 이고 지고 포도밭길을 걸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 유명한 건물들, 사람들보다 항상 장기기억에 오랫동안 기록되는 것은 고생하고 실수하고 길을 잃어버렸던 순간들이다.
처음 여행을 다닐 때는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거나 사소한 실수들로 차질이 생기고 추가적인 지출을 하거나 시간을 버리게 될 때 너무 아깝고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제는 그런 실수와 길 잃어버리는 것을 여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보다 쉬워졌다. 나 자신에게도 조금은 더 관대해지고 있다.
조금 돌아가도, 실수해도 괜찮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리고 더 걸어야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길이 나오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