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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여행하기- ③ 루가노

스위스에서 느끼는 이탈리아의 향기, 개방성과 다양성에 대한 사유

by Helping Hands

장크트 갈렌의 다니엘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역으로 향했다. 남부 지역에 있는 루가노(Lugano)라는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 위해서다.



스위스의 언어와 지역색


스위스는 국토면적이 한국의 절반 정도로 매우 작지만, 프랑스와 가까운 서쪽은 불어를, 독일과 맞닿아있는 동쪽은 독일어를, 이탈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남쪽은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여기에 고어인 로망슈어까지 공식 언어가 총 4가지다. 대부분의 주(canton)에서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로잔이 속한 보(Vaud) 주에서는 불어를 사용하기에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평상시 가장 많이 듣는 것은 불어였다.


베른(Bern)이나 루체른(Luzern) 같은 지역으로 기차여행을 갈 때면 로잔에서 불어로 시작했던 안내방송이 어느새 독일어로 바뀌고, 기차 역명 역시 불어에서 독일어식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역마다 사람들의 성향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조금 더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것 같은 로잔에 비해 독일어를 쓰는 지역의 사람들은 왠지 더 시간 약속도 철저하고 엄격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로잔에 있을 때 주변에 일을 아주 열심히 하고 FM으로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너 꼭 스위스 저먼(Swiss German: 독일어 쓰는 스위스 지역 사람) 같다"라고 하곤 했다. 이런 정직함과 정확성 때문에 스위스 시계가 그렇게 유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시계뿐 아니라 버스 배차간격이나 기차 출발 시간도 자로 잰 듯 늘 정확하고 오차가 없는 편이다.


어쨌든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했다. 루가노를 여행 일정에 포함시킨 것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남부 알프스 산악지역의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며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다른 지역과 어떻게 다를지 한껏 기대를 안고 갔다.


그런데 루가노로 향하는 기차 안의 분위기가 그동안 스위스에서 기차를 탈 때마다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도 한껏 풀어져 있는 모습이고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릴랙스 한 느낌이랄까.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에 가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한 번의 경험으로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지역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만큼 사람들의 성향이 다른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스위스 안의 작은 이탈리아


장크트 갈렌에서 세 시간 남짓 걸려 루가노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나와 밖을 바라보니 그 풍경이 장관이었다. 아직 마을로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지대가 높은 기차역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그만 첫눈에 반해버렸다. 사람들이 이래서 그렇게 루가노를 가보라고 했던 거구나 단박에 수긍이 갔다.


우뚝 솟은 첨탑과 붉은색을 자랑하는 지붕들, 멀리 보이는 호수와 완만한 산등성이가 여태껏 익숙하게 봐왔던 스위스 풍경과는 다른 첫인상을 남겼다. 처음 유럽 여행을 왔을 당시 이탈리아의 산들을 보며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능선이 우리나라 산들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반해 스위스의 산들은 더 뾰족하고 선이 굵은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루가노의 산은 이탈리아나 우리나라의 산과 조금 더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긴 루가노에서 호수를 건너면 20분 만에 바로 이탈리아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이니, 지형적으로 이탈리아와 흡사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기차역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내리막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유난히 맑고 화창한 날씨도 한몫했겠지만, 주황색과 노란색 계열로 칠한 외벽과 빨간 기와를 얹은 건물들이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풍겼다. 거기에 파란 하늘색과 산과 호수의 초록빛이 대비되어 풍성한 색감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루가노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왼쪽 사진), 루가노 역에서 내려다본 풍경(가운데), 루가노 시내 풍경(오른쪽 사진)


언어 장벽과 메뉴 선정 실패


마을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시내에는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들이 즐비했다. 토요일을 맞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에 가까운 곳인 만큼 다른 스위스 지역보다 그래도 음식이 좀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스위스 음식에 대해서는 이미 기대치를 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음식에 가까운 맛있는 메뉴를 먹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맛집 검색에 나섰다.


고민 끝에 신중하게 고른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을 보니 리조또를 먹고 있었다. 양도 푸짐하고 제법 맛있어 보여서 같은 메뉴로 시킬까 하다가, 지배인에게 추천 메뉴를 물어보았다. 그가 추천해 준 몇 가지 메뉴 중 하나를 선택해 주문했다. 배도 많이 고픈 상태였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불타 있었던 내 앞에 드디어 주문한 메뉴가 도착했다.


그런데 엥??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접시를 본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이게 끝일 리 없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몇 번을 눈 씻고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얇게, 아주 얇게 저민 소고기 위에 더 얇게 썰어낸 파마산 치즈 가루, 그리고 레몬 한 조각.

그리고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인가 싶게 함께 나온 식전 빵과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나를 당황시켰던 카파치오. 다른 이탈리아 음식 이름은 다 잊어버려도 카파치오는 절대 안 잊어버릴 것 같다.

아니 지금 소 한 마리를 가져다줘도 다 먹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시장한 나에게 이런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은 메뉴라니. 거기다 가격이라도 싸면 모르겠다. 20 CHF(한화 25,000원)이 넘는 가격에 이 무슨.


어쩐지 지배인이 아까 주문할 때 다른 메뉴는 더 필요한 게 없는지 계속 물어보긴 했다. 으레 물어보는 것이겠거니, 아니면 와인이나 다른 마실 것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지배인 입장에서는 애피타이저만 시키고 메인 메뉴를 시키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물어본 것이었을 테다.


날 돈 많은 일본인 관광객쯤으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애피타이저를 추천해주고 당연히 메인 메뉴도 추가 주문할 거라고 기대했나 보다. 아 아저씨... 전 그냥 장기 체류하는 가난한 여행객일 뿐인데요.


아... 차라리 그냥 리조또 시킬걸. 괜히 맛있는 메뉴, 안 먹어본 메뉴 먹어보겠다고 했다가 원치도 않는 육회를 먹게 생겼다. 참기름이랑 소금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퍽퍽한 빵과 함께 간도 거의 안되어 있는 소고기를 씹어 삼키며 왠지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니, 화가 났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특정 대상한테 화가 났다기보다, 그저 맛있는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에, 고대하던 점심을 이렇게 때웠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세상에서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데. 평소 맛집이나 맛있는 음식을 그렇게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이날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배로 밀려왔다.


나중에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네덜란드인 친구가 혹시 그 메뉴가 '카파치오(carpaccio)' 아니었냐고 했다. 덕분에 생소해서 가물가물했던, 육회 사촌쯤으로 기억되었던 그 음식의 본명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양은 적지만 스위스는 워낙 물가가 비싸니 소고기로 만든 메뉴면 20 CHF이 넘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그치, 그래 맞아. 나도 알고 있어. 근데 좀 슬프긴 하더라....


그래도 덕분에 '카파치오'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유람선으로 루가노 즐기기


그렇게 충격과 공포의 점심시간을 보내고 일어서는 길, 찝찝하고 화난 마음을 달래줘야겠다 싶어 달달한 걸 먹기로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젤라또가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루가노에서 곳곳에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그중 맛있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주문을 하고 젤라또를 손에 받아 들었다. 깊고 진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방금 전까지 느꼈던 짜증과 분노(?)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소화도 시킬 겸 기분전환도 할 겸 호숫가로 나가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특이하게 호숫가 옆에 작게 모래사장을 만들어 놓고 비치파라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다른 스위스 지역보다는 날씨가 따뜻한 편이어서인지 휴양지 느낌을 내려고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열대 나무도 간간히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호수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유람선이 있어서 배를 타고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루가노로 오기 위해 이날 하루 동안 기차나 페리(배), 버스 등을 타고 스위스 안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는 데이 패스를 끊었는데, 마침 이 티켓으로 유람선도 탈 수 있었다. 배로 1시간 정도 꽤 멀리까지 호수 주변을 구석구석 돌았는데, 산세도 그렇고 건물들도 전형적인 스위스 스타일보다는 이탈리아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루가노 호숫가의 풍경. 일광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루가노 풍경


다른 문화와 언어에 대한 개방성


배에서 내려 시내를 돌아다니며 상점에 들어가자 이탈리아어 지역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더 많이 났다. 가게마다 붙어있는 안내 문구도 모두 이탈리아어에, 말소리도 독일어나 불어와는 전혀 다른 억양과 높낮이였다. 이 작은 나라 안에서 불과 몇 시간만 오면 이렇게 딴 세상이 펼쳐지다니.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에 익숙한 한국사람으로서는 참 신기하고 낯선 경험이다.


유럽에 올 때마다 국경과 국가, 언어와 민족, 문화에 대한 이들의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참 많이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대륙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국경을 넘는 이동이 비교적 자유롭고 쉬운 유럽에 비해 한국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과 같다. 위로 북한과 중국이 있지만 분단이라는 현실로 인해 육로로 연결될 수 있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을 가려고 해도, 중국이나 러시아를 가더라도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북한에는 아예 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유럽에서는 나라 간 이동을 할 때 국경 검문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매우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연합이나 쉥겐 조약에 속한 국가들 사이의 이동은 더 쉽다. 역사적으로도 하나의 대륙으로 이어진 만큼 국경선 변화에 따라 알자스로렌 지방처럼 프랑스에 속했다가 독일에 넘어갔다가, 다시 프랑스령이 된 곳도 있다. 물론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유럽 안에서도 뿌리 깊은 갈등을 갖고 있거나 대립각을 세우는 국가들도 있다.


하지만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처럼 이들에게 있어 단일민족, 단일 국가, 단일문화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처럼 강하지는 않지 않을까. 언어만 해도 독일어와 영어는 문법적으로 매우 유사해서 독일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속도는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빠른 편이다. 불어에도 영어와 동일한 단어가 많아서 이점이 있다. 이탈리어와 스페인어의 경우 서로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해도 70~80%는 통한다고 하니, 참 부럽기도 하고 신기한 일이다.


물론 각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모두 다르고 고유하기 때문에 유럽의 모든 것이 다 좋다거나 더 우수하다거나, 다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사대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유럽에도 인종차별주의자는 존재하고,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표방하는 극우단체들도 존재한다. 또, 반대로 요즘에는 우수한 한류 컨텐츠가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따금씩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단일성'에 대한 신화와도 같은 믿음들, 다양성공존을 논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를 볼 때마다 우리에게도 유럽인들과 같은 개방성과 경계를 뛰어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데 너무 익숙하다. 우리 편에 대해서는 더없이 친절하고 챙겨주는 따뜻한 얼굴을 하지만, 우리 편이 아닌 타자에게는 냉정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 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의 편', 반대급부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중립국으로 살아가는 스위스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도 융합과 조화, 평화라는 가치가 조금 더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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