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근교 호수, 가족 중심의 삶
스위스는 빼어난 풍광의 알프스 산맥과 함께 1,000여 개가 넘는 호수를 자랑한다. 내륙지역에 위치해 바다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아름다운 호수의 경치와 맑은 물빛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휴일이나 주말에 로잔이나 근교의 호숫가로 가서 바람을 쐬거나 물놀이를 즐길 기회가 꽤 많았는데, 그중 자주 찾았던 장소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로잔에는 메트로 1, 2호선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지하철 노선에 비하면 매우 짧고 단순하다. 메트로 2호선 종점 중 하나인 우쉬(Ouchy) 역에서 내리면 레만 호수(lac Leman)와 건너편으로 펼치진 프랑스 에비앙(Evian) 지역의 알프스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에비앙 생수로 유명한 그 에비앙이 맞다.
우쉬에 있는 CGN 페리 선착장에서는 리옹, 시옹, 몽트뢰 등 인근 지역 및 레만 호수를 건너 프랑스 지역인 에비앙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2019년 로잔에 일주일간 쉬러 왔을 때 당일치기로 에비앙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20분 정도면 도착한다. 배도 꽤 자주 있는 편이어서 로잔으로 여행을 간다면 에비앙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에비앙 마을 자체는 크지 않아서 반나절 정도면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시골 마을에 가깝고, 에비앙 물과 관련된 기념품샵에서 관련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로잔과 가깝지만 프랑스이기 때문에 에비앙에서 쇼핑이나 식사를 즐기려면 유로(Euro)화를 준비해 가야 한다.
에비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쉬에서 호수를 즐기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놀이터와 공원이 보이는데, 그 앞으로 펼쳐진 호숫가에서는 언제나 백조들을 볼 수 있다. 뭍에 나와 털을 고르는 백조,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쉬는 백조, 호수 바닥의 수초를 먹느라 궁둥이를 위로 한껏 치켜든 채 잠수하고 있는 백조, 사람들이 주는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는 백조, 우리가 잘 아는 전형적인 백조의 모습대로 우아하게 수면을 가르며 헤엄치는 백조 등 다양한 백조들의 모습을 원 없이 즐길 수 있다.
우쉬는 관광지에 가까운 곳이라서 호수를 따라 레스토랑과 카페, 호텔 등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관광객이나 여행객, 주말 나들이객이 많이 찾는 곳인 만큼 로잔 시내와는 달리 일요일에도 식당이나 카페들이 대부분 문을 연다. 대형 슈퍼마켓인 Migros도 문을 열고, 또 다른 슈퍼마켓 체인인 Coop의 편의점 버전도 일요일에 문을 연다.
호수를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걷거나 이곳의 명물 중 하나인 올림픽 박물관을 관람하고 난 후 주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Migros, Coop에서 샌드위치나 빵, 과일 등을 사서 공원 잔디밭에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호수와 알프스의 경치를 바라보노라면 마음속 소음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쉬가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자연이라면, 류뜨히(불어식 발음을 한국어로 표기하자니 좀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조금 더 전원적이고 가족적인 장소에 가깝다. 로잔 시내에서 이곳으로 갈 때는 주로 9번 버스를 타고 20~30분 정도 걸려서 가거나 로잔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Pully를 지나 두 번째 정차역인 류뜨히 역에서 내려서 가곤 했다. 시간상으로는 기차가 훨씬 빠르긴 하지만, 기차 시간에 맞춰 기다리는 시간도 그렇고 버스를 타고 지나는 길에 풍경 구경도 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주로 버스를 타고 많이 다녔다.
우쉬가 '바라보는 호수'에 가깝다면, 류뜨히는 '즐기는 호수'에 조금 더 가깝다. 우쉬에서도 산책로를 따라 위쪽으로 많이 걸어 올라가다 보면 현지인들만 아는 것 같은 숨겨진 장소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도 5년 전 로잔에 일 년간 있을 때 그런 장소가 있는 줄 몰랐고, 이번에 세 달 살기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에 우연찮게 발견했다. 그런 만큼 여행으로 잠시 로잔에 방문해서 우쉬에서 수영할 수 있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쉬는 주로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고 쉬는 느낌이다.
그에 반해 류뜨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와서 잔디밭 위에 자리를 펴고 피크닉도 즐기고, 수영도 하는 야외 수영장 느낌에 더 가깝다. 맑은 날 이곳을 찾으면 아마 헐벗은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오히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더 눈에 띈다.
수영을 하지 않고 경치만 즐기더라도 충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왕 이곳까지 왔다면 미리 수영복과 타월 등을 잘 준비해서 알프스에서 수영하는 황홀한 기분을 만끽해보길 바란다. 일본에 라면 먹으러 다녀온다는 말처럼, 알프스에서 수영하고 스키 탄다는 말이 이곳에서는 현실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호숫가 뒤편으로 작은 가게나 레스토랑들이 있기는 하지만, 수영하고 젖은 옷을 입고 가기도 애매하고 또 문을 열었을지도 장담할 수 없으니 물놀이 후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먹을거리를 사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수영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수 안쪽으로 점프대도 마련되어 있으니 용기 있는 사람은 한 번쯤 도전해봐도 좋을 법하다. 도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고등학생들, 꼬맹이들도 이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점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르쥬는 그간 인연이 없어서 가보지 못하다가 이번 스위스 세 달 살기 중 지인의 안내로 가보았다. 매년 5월마다 열리는 튤립 축제가 유명한데, 아쉽게도 튤립 축제를 보지는 못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축제 기간 중 꼭 가보고 싶다. 누가 꽃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거라던데. 나이 좀 들면 어떤가, 꽃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모르쥬의 호숫가는 다른 곳과 좀 다르게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보통 호숫가 주변에는 잔디밭이나 아니면 자갈이 깔려있는데, 부드러운 모래가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는 가족들이나 해변 느낌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지인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트에서 미리 고기를 사서 호숫가에서 그릴에 구워 먹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는 언제나 배로 맛있다.
잔잔한 물살 때문인지 패들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꽤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패들보트를 대여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빌려보지 않아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말...).
5년 전 로잔에서 일 년간 살 때도 그랬고, 이번에 세 달을 살면서도 느낀 것은 스위스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식이 매우 가족중심적이라는 점이었다. 워낙 자연환경이 좋기도 하고 상점이나 가게들도 일찍 문을 닫고 우리나라처럼 유흥이나 다른 즐길거리가 많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호수를 찾을 때면 언제나 가족단위로 자연을 즐기며 수영하고 쉬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물론 스위스에도 클럽이나 주점 등이 있고, 그런 곳에서 여가를 보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외부인으로서 봤을 때는 단조롭고 가족중심적인 것 같은 그들의 삶에서 배우는 것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나라도 예전보다는 덜한 것 같지만, 강남역이나 홍대 등 서울 중심가를 가면 24시간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게 수많은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밝히고 있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역동적(dynamic)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실제로 많은 외국인들이 그런 서울과 한국의 매력에 빠져 우리나라를 찾기도 한다. 모든 것이 너무 느리고 단순한 유럽이나 미국, 혹은 그 어디가 되었든 자신들의 나라보다 다채롭고 활기 있는 이곳이 더 좋다며.
삶의 방식과 속도가 다르기에 어느 하나가 더 좋다 나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족중심적이고 단조로운 삶이 우리에게도 조금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다가왔으면 한다.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 언제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쉬지 않고 돌아가는 도시는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쉼과 여유가 없는, 가족들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먼저가 되기 일쑤인, 전도된 우선순위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굴이 있다.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 우리가 가장 먼저 챙기고 돌봐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진정한 우선순위를 잊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