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저녁이 있는 삶, 일과 삶이 구분되고 개인 시간이 확보되는 ‘워라밸’이 지켜지는 삶, 많이들 꿈꾸는 삶일 것입니다. 워라밸은 ‘워크 라이브 밸런스(work 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개인적인 삶 사이의 균형을 뜻합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업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개인의 삶에 집중하며, 일이나 개인 삶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구직시장에서는 워라밸이 잘 지켜지는 기업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 상위권에 자리 잡으며 좋은 일자리의 기준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워라밸을 대신할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워라하’, ‘워라블’입니다.
대부분은 이 단어들이 생소하게 느껴지실 테고, 처음 접하신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워라하는 ‘워크 라이프 하모니(work life harmony)’, 워라블은 ‘워크 라이프 블렌딩(work life blending)’의 줄임말입니다. 신조어도, 줄임말도 많아진 요즘 새롭게 배워야 하는 단어가 또 생겼구나 싶으실 수도 있을 텐데요.
기존의 워라밸 개념은 일을 강조하며 직장생활과 개인 삶을 동일시했던 기성세대의 문화인 허슬 컬처(hustle culture)와 달리 일과 삶의 분리를 강조한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일의 비중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개인 삶은 줄어들고, 반대로 개인 삶이 늘어나면 그만큼 일의 비중이 줄어든다고 전제합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며 개인적 삶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이렇게 일과 삶을 대립적, 배타적 관계로 바라본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관점으로서 ‘워크 라이프 하모니’, ‘워크 라이프 블렌딩’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워크 라이프 하모니는 말 그대로 삶과 일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이 개념에서는 일과 삶이 대립하고 어느 하나가 늘어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섞이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섞이다’라는 뜻을 가진 블렌딩이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되는 것이지요.
워라하는 2018년 4월 아마존 CEO 제프 베이조스가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악셀 슈프링거 2018 시상식에서 처음 이야기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제안하고 나서 그는 워라밸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워라하는 개인 삶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삶이 조화로운 원을 그린다는 개념입니다. 즉, 워라밸의 시각에서 일과 삶을 양쪽에 놓고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고 섞이기도 하면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는 그런 순간들 말입니다.
비즈니스 미팅이나 교육을 위해 떠난 출장지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거나 새로운 장소에 가며 여유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쉼의 시간 중 또 다른 영감을 받아 일에 접목할 수도 있고요. 퇴근 이후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내용을 직장생활이나 업무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일을 하며 새롭게 접하게 된 분야를 취미로 확장해 볼 수도 있겠지요.
워라밸 관점에서는 업무시간이 끝나고 나면 칼같이 업무에 관한 생각이나 업무 관련 연락은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깁니다. 마치 퇴근할 때 사무실 불을 끄면서 우리 머릿속의 업무 관련 스위치도 함께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스위치가 우리 생각만큼 잘 꺼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또, 업무로 인해 개인 삶이 줄어드는 상황이 생기게 되면 일과 일터가 싫어지고 내 삶의 방해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일과 삶이 창과 방패처럼 늘 싸우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워라하, 워라블 관점에서 일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일이 내 삶을 갉아먹거나 피폐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삶을 더 풍요롭고 다양하게 해주는 촉매제나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일에서 경험하거나 배우는 것들이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삶에서 시도하는 다양한 것들이 일에도 영감과 창의력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분야를 업무와 연결할 수도 있고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과 삶의 관계가, 어쩌면 둘을 함께 얻을 수도 있는 윈윈(win-win)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삶이 일을 더 풍성하게 만들며, 일과 삶이 통합될 수 있다는 ‘워라인(work life enrichment, work life integration)’으로도 이어집니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업무적 성과, 충실한 조직 생활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워라하, 워라블이 자칫 일과 삶의 구분을 어렵게 하고 기성세대의 일 중심 문화로의 회귀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와 비판도 있습니다. 일과 삶이 서로 시너지를 내면 좋겠지만 그것은 이상향이고 현실에서는 일이 개인의 삶을 잠식할 가능성을 더 열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염려이지요. 반대로 다른 한 편에서는 워라밸에 대한 강조가 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일과 삶을 지나치게 구분 짓는 태도를 불러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다양한 시각과 변화는 달라진 사회상과 우리의 인식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은 변화의 기로에 있는 한 번의 과도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과도기가 앞으로도 몇 번이고 계속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과정이 우리가 일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각자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우리의 일과 삶을 더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