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도 괜찮아 ②] 실수해도 괜찮아
“난 실수할까봐 두려워.”
얼마 전 50대 회사 선배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50대에도 실수를 할까봐 두려워 하다니’에 한 번 놀라고, 언제나 허허허허 하며 심각할 것 없어보이는 선배가 사실은 ‘완벽주의자’였다는 고백에 두 번 놀랐다.
그 선배는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고 느긋해 보이는 성격에 부러움마저 들던 캐릭터였다. 왠지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잘 것 같고, 고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인생이 그런 거지’ 하고 넘길 것 같은 사람. 한 달 전엔 노트북을 깜빡하고 회사에 출근한 적도 있는 선배여서, 역시 그렇군 했던 터였다.
그런데 완벽주의자라니… 심지어 완벽주의자인데 본인이 완벽하지 않아서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니.
어른은 완벽하지 않다
반백살, ‘지천명’의 나이 오십 정도가 되면 누가 봐도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 모든 게 안정되고 완전해질 줄 알았다. 지금 모든 게 불안하고 초조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아직 어려서(?)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인생의 의미도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자연히’ 깨닫게 되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른=완전체’라는 흔한 착각의 도식은 매일, 매순간 깨진다. ‘으른’인 나는 오늘도 지각을 할까 종종거리고, 스스로와 한 ‘주 2회 음주’ 약속을 거의 매주 어기며, 내년에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한 결정이 옳은 것인지 때때로 초조해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는 건 덤이다. 이렇게 어른은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당연히 완벽하지도 않다. 내가 그런 것처럼.
쉰을 지나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어도 막막함과 불안은 비슷하다.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는 일은 이렇게나 막막한 것이었다.
너 생각해봐라. 우리가 이제 백 년을 산대요.
세계일주 한다면서 가진 돈 다 써 조지면은 써 조지면은 나중에 어떡할 거야.
늙은이 둘이 길바닥에 앉을 거야 어쩔 거야.
- <디어 마이 프렌즈> 12회 신구
3년 전 여름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면서 75세 신구 할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개미처럼 일해서 열심히 모으면 나중에 늙어서는 여유가 자동으로 생기는 줄 알았는데, 여유도 '나이의 훈장'이 아니었다. 늙으면 자연히 가슴에 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 갖지 못하면 늙어서도 가질 수 없는 것. 칠십이 되어서도, 팔십이 되어서도 백세 때를 걱정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불안하고 답을 모른 채 산다는 것. 아이였을 때에는 ‘어리니까 당연한 거야’라는 위로를 받았겠지만, 이젠 그런 위로를 해줄 ‘더 큰 어른’을 찾기도 난망하다. 완벽하지 않은 헛점투성이인 ‘어른’으로 그냥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조금씩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안한 어른의 길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가기 위해 나는 덜 완벽해지기로 했다. 물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고를 막고 밥벌이를 하기 위해 회사에서 종종 거리겠지만, 개인적인 시간에서만이라도 널널해지기로 했다.
당연히 완벽하게 살 수 없는 인생을 완벽하게 살지 못할까 초조해하며 옥죄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 달지 못하면 20년 뒤에도 갖지 못할 여유라는 배지를 달기 위해.
이 세상에 완벽한 어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