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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 Oct 23. 2021

마지막 한 발까지 뛰는 사람

[아무튼 스쿼시] 포기하지 않는다

힘든 여행지에 가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20대 인도를 여행하던 시절 우린 우스갯소리로 "결혼 전 애인이랑 인도 여행을 와봐야 한다"고 말했다. 50도에 육박하는 더위와 길거리에 널린 소똥, 연착을 밥 먹듯 하는 기차, 중앙선을 넘나드는 차 등 인내심의 역치를 넘어서는 여행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선 이 사람이 힘들 때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인지, 그 와중에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숨겨지지 않는다.


힘든 운동도 몰랐던 나를 알게 한다.


운동을 하다보면 체력의 밑바닥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나조차도 몰랐던 나다. 선생님 말은 듣지 않고 내 뜻대로 하려는 똥고집과 공을 치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가는 성급함은 맑은 물 속 물고기처럼 훤히 들여다 보인다.


심지어 나는 몸치였다. 몸치는 운동도 못 한다는 사실을 스쿼시를 치며 알게 됐다. 박자에 맞춘 스텝과 스윙, 따로 공들이지 않아도 숨쉬기처럼 자연스레 펼쳐져야 하는 동작들이지만 내가 할 때면 달랐다.


"왼쪽 어깨를 더 돌리고 다리는 런지한 상태에서 한 번에 스윙하세요."

"쿵쿵 뛰지말고 바닥에 스치듯이 사이드 스텝으로~"

"잔발로 오세요 잔발로, 박자를 맞춰서 하나 둘 스윙"


선생님 말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거울에 비친 나는 마치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삐그덕 거리고 있었다. 인내심을 갖고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나지막이 물었다.


"회원님, 머리로는 이해하셨죠?"


나는 더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머리로 이해했고, 마음으론 그렇게 치고 있어요."


내 머릿속 나는 정말 그렇게 치고 있었다. TV 속 선수들처럼 숨쉬듯 자연스럽게, 마치 이런 샷이라면 천 번도 칠 수 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거울속 내가 상상과 달랐을 뿐이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적인 건 나는 마지막 한 발까지 뛰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구석에 밀어넣다'라는 뜻을 가진 스쿼시는 득점을 위해 상대가 달려가기 어려운 구석에 공을 밀어넣곤 한다. 코트 뒤쪽에 있는 공을 치다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기란 상상만 해도 숨차는 일이다. 그래서 회원들은 보통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한다. 목에 피맛이 나도록 죽도록 달려가 라켓을 대든가, 포기하든가. 나는 전자였다. 


"회원님 체력은 진짜 좋아요"라는 선생님의 칭찬은 마지막까지 공을 포기하지 않는 나에 대한 훈장이었다. 물론 이런 끈기는 가끔 사고(?)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선생님과 5분만, 딱 5분만 더 하기로 한 연습에서 나는 여느때처럼 공을 향해 달려가려 발을 내딛었고, 순간 내 왼쪽 엉덩이에선 와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이게 만화였다면 왼쪽 엉덩이 어딘가에서 번개 모양이 번쩍였을 것이다. 순간 숨도 쉴 수 없는 상태가 된 나는 허리를 다친 줄 알고 이리저리 허리를 숙여봤지만 허리가 아니었다. 엉덩이었다.


추정컨대 엉덩이 근육이 갑작스런 동작에 찢어진 것이다. 허리를 굽힐 때도, 앉았다 일어설 때도, 잠을 잘 때도 엉덩이에 깊숙한 통증이 찾아왔다. 내가 무슨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해서... 오만생각이 다 들었지만 한 10일 정도 지나니 몸이 괜찮아졌고, 정신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다시 코트를 뛰고 있었다. 


공과 친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인기다. 축구에 빠져 생활하고,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운동장에 나가 힘껏 달리고 싶어진다. 나 역시 프로그램을 빠지지 않고 지켜보며 어릴 때 차던 축구공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방송 이후 실력에 대한 비난 등 여러 악플에 시달렸다고 호소하는 선수들에게 FC액셔니스타 팀 감독이었던 이영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성장이지, 성공이 아니다."


나 역시 지금처럼 내가 가장 못하는(?) 운동인 스쿼시에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내가 한 노력만큼 잘하지 못해도 뭐 어떤가. 코트 안에서 성장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앞으로도 마지막 한 발까지 뛰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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