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쿼시] 취미인데, 입스가 왔다
어, 이상하다.
어제까지 되던 서브가 정말 '하루아침에' 안 되기 시작했다. 다시 공을 쥐고 치는데도 공은 서브라인을 벗어나 천장으로 땅으로, 치솟거나 주저앉았다. 여러번 서브를 넣어봐도 똑같았다. 하루아침에 되던 동작이 안 되는 입스(yips) 증상이었다.
테니스 선수인 정현도 2016년 포핸드에서 입스 증상을 겪었다고 하지만, 난 선수가 아닌데... 아니 무슨 취미로 치는 스쿼시에서 입스가 오냔 말이다. 듣는 이도 놀랄 일이지만, 겪는 나는 더 기가 막혔다. '서브가 갑자기 고장나버린' 나는 회원들과 게임을 칠 때마다 "제가 요즘 서브 슬럼프라..." 구구절절 양해를 구하며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입스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날이 돼도, 다음주가 돼도 증상은 계속됐다. 같이 게임을 치던 회원들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며 각자의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서브를 넣어봐도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공이 라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게임을 칠 때마다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서브를 넣어야 게임이 시작되는데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거다. 게임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 났다. 이기면 서브를 넣어야 하니까(이기는 게 무서워질 줄이야). 21점 게임을 치는 동안 내준 점수의 대부분이 서브 실책인 날도 있었다. 초보에게도 입스는 그렇게 무섭게 찾아왔다.
당시 나는 말로는 "스쿼시 선수 될 것도 아닌데 그냥 재미있게 칠래요"라며 이 운동이 그저 '취미'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승부욕의 화신이 불타고 있던 내 맘속은 사정이 달랐다. 못 쳐도 된다도 짐짓 괜찮은 척했지만 진짜 못 쳐서는 안 되는 거였다. 너무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 괜히 관심 없는 척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결국 욕심만큼 늘지 않는 스쿼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이자까지 쳐서 '서브 입스'라는 사태로 돌아온 것이다.
스쿼시 강습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힘 빼고 툭툭 치세요"이다. 정말 팔에 힘을 빼고 툭툭 쉽게 치는 선생님의 공은 앞으로 쭉쭉 잘도 나아갔다. 하지만 학창시절 노력형 모범생이었던 나는 '힘을 빼고' 툭툭 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공 하나하나를 허투루(?) 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잘 치고 싶은 나머지 팔엔 힘이 잔뜩 들어갔고, '잘치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뿜어내며 있는 힘껏 공을 내리쳤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더욱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 모든 일을 시험 치르듯 하는 모범생의 슬픈 말로였다.
몇 년 뒤 운명처럼 그때의 나를 보는 듯한 회원을 만났다. 여러번 랠리를 주고 받았던 사이인데 언제부턴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팔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게 보였다. 모범생은 모범생을 알아본다. 넌지시 물었다. "학교 다닐 때 모범생이었어요?" "네". 나의 전철을 그도 밟을 게 훤했다.
"저도 그랬는데, 모범생들이 너무 잘하려고 해서 더 안 되더라고요. 스쿼시 일 아니고 취미잖아요. 못 쳐도 돼요. 편하게 몸에 힘 빼고 치세요. 못 쳐도 진짜 괜찮아요. 취미예요, 취미."
대한민국 올림픽 최초 하계 올림픽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는 슛오프 승리 비결에 대해 "'쫄지 말고 그냥 대충 쏴'라고 되뇌었다"고 밝혔다. 올림픽도 대충 쏴야 잘 되는데(?) 취미는 더더욱 대충 해야 '진짜' 잘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쉽지 않다는 게 함정이지만.
입스에 갇혀있던 당시 나는 강습날마다 공을 두 박스씩 놓고 서브만 죽어라 연습했다. 참으로 노력형 모범생다운 해결책이었다. 다행히 수천 개의 공을 치고 났더니 서브가 별일 아닌 일이 돼 버렸다. 그러니 자연히 몸에도 힘이 빠졌다.
우리는 못 쳐도 괜찮다. 진짜. 아니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