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쿼시] 진짜 승부
2019년 생애 처음 스쿼시 대회에 나갔다. 같은 센터에 다니던 회원의 권유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경험삼아' 나간 것이었다. 수상경력 등에 따라 2개의 등급으로 나눠진 대회에서 나는 초보반(이라고 착각한) B조에 출전했다.
스쿼시를 친 지 3년째 되던 해였고, 정식 코트에서 치러지는 경기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또 생각보다 잘 칠 수도 있다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대회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초보라고 '착각한' B조에서도 어깨를 돌려 슝슝 공을 때리는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이럴거면 나는 D조나 E조 정도에서 뛰어야 했다.
대회 전날 우리에게 고기를 사줬던 스쿼시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경험이라 생각하고 해보시고 오세요"라는 말로 미리 상처 자리에 연고를 발라줬던 것이다.
경기는 3판 2선승제. 1차전에서 붙은 상대에 연거푸 11:2 언저리 점수로 '광탈'했다. 너무 빨리 떨어져 '마상'을 입을 틈도 없었다. 다만 아침 일찍 일어나 택시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온 것에 비해 너무나 빨리 떨어졌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었다.
나와 상대 선수가 코트 밖으로 나오자 상대 선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언니 하나도 안 힘들지". 네 아마 하나도 안 힘들 겁니다... 그 선수는 내가 에너지를 비축해준 덕분에(?) 우승까지 했다.
스쿼시는 어떻게든 승부가 날 수밖에 없는 게임이지만, 그렇다고 이기는 게 전부인 운동은 아니다.
스쿼시를 치다보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고백하건대 승부욕에 불탔던 과거의 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떤 날은 힘으로만 엉뚱하게 볼을 쳐서 나를 이기려는 초보 회원을 만나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말했다. "힘을 빼고 쭉 뻗어서 치세요. 오늘 저 이기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어느 날 하루 누군가를 이기는 건 길게 봤을 때 큰 의미가 없다. 내가 저 사람보다 잘 쳐서 느끼는 우월감은 짜릿하지만, 어제의 나보다 바른 자세로 잘 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지루하지만 그게 맞는 길이다. 남을 한 번 이겼다는 우월감보다 발전하는 나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윈윈'을 위한 소소한 참견을 하기도 한다. 초보회원들에게 라켓은 어떻게 잡는 게 좋은지, 왜 그렇게 치면 안 되는지 설명해준다. '고집쟁이 초보'였던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법한 팁들을 말해준다. '고생하다보면 알게 될 겁니다' 하고 두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보다 더 잘 치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덩달아 나 역시 더 잘 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혼자 잘 쳐서 느끼는 우월감보다 '우리가 잘치게 되는' 변화가 내 발전에도 더 좋다.
얼마 전 테니스 세계랭킹 1위 선수인 조코비치가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실패했다. 테니스계의 떠오르는 신성 메드베데프에게 3-0으로 완패를 당했지만 그는 눈물을 흘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더 강해지는 법을 배우고 계속 나아갈 것"이며 "여전히 이 스포츠를 사랑할 것이고 늘 코트 위에서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가 멋있는 이유는 이처럼 이기고 지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