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쿼시] 드라마 속 스쿼시 & 현실의 스쿼시
괴로움에 가득 찬 얼굴로 남자주인공인 재벌 3세가 어딘가로 향한다. 이내 장소는 실내로 바뀌고 남자주인공은 벽을 향해 냅다 라켓을 휘두른다. 팡 팡 공이 타격감을 뽑내며 되돌아오고 남자주인공은 라켓을 연거푸 휘두른다. 이윽고 카메라는 땀을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운 남자주인공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검은 스쿼시 공이 남자주인공 옆으로 또르르 구른다.
여기까지가 TV 드라마에 나오는 스쿼시의 모습이다.
남자주인공들은 대체 왜 괴로울 때 스쿼시를 치러가는 걸까.
1. 액티브하게 움직이며 땀을 뽑아낼 만한 운동이어야 하고
2. 혼자 즐길 수 있어야 하며 (괴로운데 시간 맞는 친구 찾느라 전화를 돌릴 순 없으니)
3. 멋있어야 한다.
그런 운동으로 스쿼시만한 게 없다고 방송국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 2030세대에 유행하는 골프는 안타깝게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더 터질 것 같은 운동으로 잊게 할 수 없다. 또르르.)
그런데 간혹 TV에 나오는 스쿼시를 보고 있자면, 우아한 백조의 상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직 상체만. 처절하게 움직이고 있는 하체는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라켓을 냅다 휘두르고 가만히 서 있는 남자주인공을 보고 있는 내 귓전에서 스쿼시 선생님의 음성이 메아리친다.
"회원님, T존으로 빨리 오셔야죠."
네 가고 있어요. 이게 가고 있는 거예요.
"회원님, 그렇게 라켓 휘두르지 말고 팔을 쭉 뻗어야죠."
제가 또 휘둘렀나요? 마음으로는 쭉 뻗어서 치고 있어요...
현실에선 공을 치자마자 T존으로 돌아가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음 볼을 칠 수 있다. 여유를 부릴 틈 같은 건 없다. 공을 침과 동시에 '냅다 뛰어' 다음 공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 공을 '예쁘게' 쳐야 한다. 특히 화가 나서 혼자 치러 간 거면 더욱. 왜냐, 공을 예쁘게 쳐야 나한테 돌아온다. 아니면 공을 치는 것보다 주우러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질 테니까.
당연히 현실과 비슷한 점도 있다. 정말 드러누울 만큼 힘들다. 5년 동안 강습 받다가, 게임 치다가 바닥에 드러눕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눕는 사람, 철푸덕 주저앉는 사람, 벽을 붙잡고 서지도 앉지도 못 하는 사람... (나는 라켓을 지팡이처럼 짚고 허리를 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쿼시를 하다보면 다양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내 몸 다양한 부위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머리, 어깨, 무릎, 발, 엉덩이(스쿼시 기본 동작이 런지다).
실내외 운동 중 1분당 소모 칼로리(15Kcal)가 가장 높은 운동으로 알려진 스쿼시는 명성에 걸맞게 혼자 쳐도 아쉽지 않게 힘들다. 정말 전혀 아쉽지가 않다.
그래도 내 평생 이렇게 뛰어본 적이 있었나 싶게 뛰고 나면 기분 좋게 땀이 쭉 빠진다. 그리고 곧 무엇 때문에 괴로워었는지 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지가 다 쑤시면 작은 고민들은 툭툭 털어버리게 되는 대인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시간들을 통과하고 나면 어느날 어제보다 '조금' 더 멋있게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남자주인공들이 스쿼시를 치러 가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